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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작가님들이 글을 작성하기 시작할때의 과정을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장르나 분야의 글만 읽고 분석하지 않고 우선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로 탐험을 떠나는 과정도 필요 합니다. 판타지 소설을 싫어할 수 있지만, 분명 그것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나의 글을 쓰기 위해 남의 글을 일고 배우기 위해 남의 글을 읽습니다. 영감을 얻기 위해 읽는 것 입니다. 그리고 탐험가의 정신으로 주변을 관찰 하고 기록하는 습관도 중요 합니다. 그러다 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학문 /
음악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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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이지란은 여진족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연유로 조선인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진족이 였던 이지란이 향화(向化, 귀화)를 택한 때는 한창 활동할 시기인 41세 때였다고 합니다. 1371년(공민왕 20)에 여진 천호(千戶) 이지란은 휘하의 백호(百戶) 보개(甫介)를 보내어 향화 의사를 밝힌 후에 100호(戶)를 거느리고 고려로 왔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고려에서 무장으로 활동하였고, 주로 이성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1380년(우왕 6)에 전라도 운봉(雲峰, 남원) 지역에 쳐들어온 왜구를 황산(荒山, 黃山)에서 크게 무찔렀고, 1383년(우왕 9)에는 단주(端州, 함경남도 단천)를 침략한 요동(遼東), 심양(瀋陽)의 초적을 몰아냈고, 곧이어 와서 노략질하던 여진 쿠바투[胡拔都]도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1388년(우왕 14)에는 위화도회군에도 기여하였다고 합니다.고려 말 이성계가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데 있어서 이지란은 매우 든든한 존재였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에 협력하면서 동북면(東北面, 함경남도)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였고, 이지란을 휘하에 두게 되면서 그 일대에 거주하던 다른 여진족들까지도 회유, 복속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여진 정책의 방향은 조선 태조대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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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예술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피카소가 예술사에 남긴 의미라면 아마도 예술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라는 주제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카소는 세잔에게 '그는 우리들의 아버지' 라고 하였지만, 위와 같은 주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피카소는 앞의 표현을 넘어, 커다란 이정표이자 선구자가 된 것이다. 피카소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어떤 일면만을 그려놓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떤 정밀하게 그려진 그림이 정말 그럴싸하고 진짜같이 보인다고 해도, 사실은 우리가 그게 움직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에 진짜로 인식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에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학문 /
미술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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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을 성군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해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습니다. 개국 초에는 한때 불우하기도 했지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정종의 뒤를 이어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 성세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1418년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기도 했지요.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은 인정 할 수 있으나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충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정몽주를 죽이고 왕권 강화를 위해서 자기 처남들과 장인 까지도 죽게 만든 장본인을 성군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 점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문 /
역사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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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여진족이라는 썰이 있더라고요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성계가 여진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의 조상을 따져 보면 쉽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全州)입니다. 전주이씨가의 후손이 여진족이 될수는 없겠지요. 처음에는 자가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었는데 이것은 이색이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등극 후에 이름은 단(旦), 자는 군진(君晉)으로 고쳤습니다.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전주에서 강원도를 거쳐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로 옮겨가면서 그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원(元)이 쌍성(雙城) 이북 지방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안사는 따르던 무리 1천여 호를 거느리고 원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안사는 다루가치, 천호(千戶) 등으로 활약하면서 기반을 닦았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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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어는 과거와 얼마나 다를까요?변화하는 기준이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선 언어는 역사성이 있어서 계속 변화하고 성장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사멸 합니다. 마치 사람의 인생과 같습니다. 한참 잘 사용하던 단어나 표현들도 갑자기 없어지기도 하니까요. 그러한 신조어들은 매년 국립 국어원에서 매년 업데이트를 진행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조어들을 계속해서 국어 사전에 올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정확한 규정이나 시기 등은 모른다고 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사용 빈도를 보면서 아마 연구원들이 조정 하지 않을 까 추측 해 봅니다.
학문 /
역사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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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에서 등장하는 의상들은 디자이너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작한 걸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주 유명한ㄴ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서는 다소 난해한 옷을 입고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우선 패션쇼에서 보이는 난해한 옷들은 대량양산을 하여 판매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브랜드의 디자인 역량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난해한 옷들은 일반 기성복 패션쇼인 프레타포르테가 아닌 오뜨꾸뛰르에서 선보이게 되며 앞으로의 패션 트랜드에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예술적인 디자인을 중점으로 하는 패션쇼가 오뜨꾸뛰르인데 이것은 영국의 찰스 프레드릭 워스 (Charles Frederic Worth)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영국인 이였지만 1860년 프랑스의 왕실 디자이너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찰스 프레드릭 워스는 프랑스 왕실의 옷만 디자인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귀족들의 옷까지 디자인하였고 자신의 디자인을 각 계절에 한두 달 앞서 선보인 것이 오뜨꾸띄루의 시작입니다.
학문 /
미술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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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나 만화 의상 코스프레 문화는 언제 어느 나라에서 먼저 시작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화나 애니의 코스프레는 일본 문화가 아니라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2차 대전 당시의 군인들의 모습을 코스프레한 의상등을 입는 문화가 미국등으로 번져 갔고 미국에서는 슈퍼맨 같은 영웅들이 의상을 입는 것과 같은 문화로 발전 했고 그 것이 일본으로 유입된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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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노비신분은 성을 가질 수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노비에게 성이 부여된 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든 국민이 성씨와 본관을 갖게 된 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세납부를 목적으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성씨를 신고 하게 했는데 1909년 새로운 호적 제도인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부터 모든 국민이 성을 가제 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이 제도는 기존에 성씨가 없던 사람들까지도 의무적으로 성씨를 가지게 된 것 입니다.
학문 /
역사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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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외국 풍습들은 어떤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일제 시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나 관공서에 액자에 담긴 태극기가 대표적 입니다. 국기를 액자에 넣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 뿐입니다.일상 금융거래에서 흔히 사용되는 인감증명도 마찬 가지인데요. 1914년 일제가 식민지 경제를 도입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로 지금은 일본에서 조차 사라진 제도인데 우리는 아직도 인감 증명서를 발급 합니다.
학문 /
역사
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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