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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50년 후 가장 국력이 강한 나라는 어느 나라일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돌고 도는 것 인가 봅니다. 많은 미래 학자 들이 2050년 경에는 중국과 한국이 세계 경제를 좌지 우지 할 것이라고 예측 하네여. 중국은 2050년 1인당 국민 총 생산량이 USD50,000로 한국USD100,000에 절반 밖에 미치지 못하지만 총 인구수를 같안 할때 세계 최대 강국은 중국이 될 것 이라는 판단 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 규모로는 미국을 제치고 제 2위에 오른다고 하구요. 특히 아시아 국가중 중국, 한국, 일본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에 포함된다고 하네여. 하지만.. 과연 그럴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의심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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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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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곰방대의 길이에 따라 신분이 달랐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며, 설대가 긴 것을 장죽,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을 곰방대라고 부릅니다.양반들은 평민과 구별 짓기 위하여 긴 담뱃대를 사용하였다고 하네여. 심지어 그들은 2~3m나 되는 담뱃대를 사용하고 하인이나 노비로 하여금 불을 붙이게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평민과 구별 짓도록 하였고, 긴 담뱃대를 재떨이에 딱딱 떠는 소리로 권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고 하지요.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울 경우 혼자서 담배통에 불을 붙이면서 물부리를 빠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불을 붙이는 하인이 딸리게 마련이었다. 즉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은 양반층을 비롯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계층에 국한되고, 일반 상민은 곰방대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 양반층 가운데서도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은 백통이나 오동으로 담뱃대를 만들고 금이나 은으로 무늬를 넣어 치장한 장죽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양반들은 담뱃대뿐만 아니라 담배통을 은이나 금으로 치장하여 평민과 구별 짓고자 하였을 뿐 아니라 멋을 내고자 하였습니다.그리하여 담뱃대의 길이와 재질을 보면 그 소유자의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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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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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철거는 왜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총독부 청사 철거 논의는 6.25전쟁 중 서울 수복 이후에도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이 경제사정이 대규모 건물을 해체할 여력이 없었기에 유야 무야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는 1990년 경복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대통령 지시 사항으로 논의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1993년 8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 사업으로 건립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이에 1994년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가 본격화되었지요. 치욕적인 역사를 씻어내자는 측에서의 완전 철거 주장과 뼈아픈 역사를 뒤풀이 하지 않기 위한 반면교사로서 역사적 증거로 보존하자는 논쟁이 일어났지요. ‘완전철거론’과 ‘현상보존론’, ‘이전복원론’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 한국 창조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웠던 당시 정부는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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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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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인물 척준경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척준경(拓俊京, 1070년? ~ 1144년 음력 2월)은 고려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입니다.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척위공의 아들이지요. 황해도 곡주(谷州: 황해북도 곡산군) 출신이다. 1104년(숙종 9)부터 1109년까지 윤관, 오연총, 왕자지 등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는데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뛰어난 용맹으로 여진족 정벌에 종군 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이자겸과 함께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장본인 이기도 하지요. 검술이 워낙 뛰어나 고려 제일 검이라는 칭호도 들었다고 하네여. 워낙 그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어서 별다른 책은 없고 어울림 출판사에 나온 <고려 무신 척준경> 이라는 소설 책만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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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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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종교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유대교 74.2% 이슬람교 17.8% 기독교 2.0% 드루즈교 1.6% 기타 4.4%입니다. 여호와를 신봉하고 메시아의 지상 천국 건설을 믿는, 유대인의 종교. 기원전 4세기경부터 모세의 율법을 기초로 하여 발달했구요. 메시아가 도래할 것을 믿으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음. 주요 성전은 구약 성서와 탈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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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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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노벨문학상 받지 못하는 이유?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나라 작품의 대부분은 사회 문화적 배경ㅇㄹ 이해 하지 못하면 해석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떄문 입니다. 즉, 고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라는 작품도 정말 우리나라 사람이 읽기에는 명작이나 우리나라의 일제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읽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지요. 공감도 잘 않되구요. 반면에 일본문학 같은 경우에는 시대 배경이랑 아무런 상관 없이 개인의 감정 등에 촛점을 맞추고 쓴 글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쉽게 접근이 가능 하지요. 일부에서는 우리 나라 말이 영어로 해석하거나 번역 하기 어려워서 라고도 하는데 그건 거의 변명이 안됩니다. 왜냐면 우리나라 언어보다 더 어려운 인도어나 다른 외국어도 상을 받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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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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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를 튀르키예라고 부르는데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튀르키에인들은 영어로 'turkey터키'라고 부르는 명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튀르키예인들도 영어 단어로 'Turkey'가 칠면조 뜻임을 알고 있고, 속어로는 '겁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터키'의 유래가 된 '튀르크'는 '용감한 민족'이라는 정반대의 뜻이지요. 또한 실제 칠면조도 겁쟁이가 아니라 사나운 성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터어키라는 나라 이름을 우리나라에서 마음대로 고친게 아니라 터어키 정부가 튀르키에로 고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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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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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여리고성은 지금의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리고성은 팔레스타인의 예리코(Jericho)로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1949~1967년 사이엔 요르단 영토였고,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했다가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넘겨준 도시입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웨스트뱅크에 위치해 있으며, 요르단강(요단강)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해수면보다 258m 낮은 곳에 위치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도시로, 현재 인구는 2만명 정도가 된다고 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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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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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로마시대 건축양식은 어떤게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거대한 건축으로는 콜로세움·판테온·수도(水道)·목욕장 등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폴로 로마노 가까이에 있는 콜로세움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원 72년에 기공 하고, 그 아들 티투스제(帝)가 80년에 완성한 타원형의 대투기장(大鬪技場)으로서 그 장경(長徑) 188m, 단경(短徑) 156m, 높이 48.5m, 외관 4층의 대건축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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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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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언제 들어왔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66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는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조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당시 셔먼호 선장이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해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죽기 직전 성경이 들어있는 작은 보따리를 박춘권이란 졸병에게 건네게 됩니다. 1899년,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지 33년이 지난 이 때 마펫 선교사 앞에서 한 남자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으로 건넨 그 한 권의 성경이 한 영혼을 살린 것입니다.토마스 선교사의 발걸음은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를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가져가 여관 벽을 도배하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관에 묵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그 중 홍신길은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됐으며,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인이었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장로가 됐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 특히 박영식은 자신의 집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으로 내놓게 됩니다. 이렇듯 조선은 선교사보다 먼저 복음을 접하고, 또 복음으로 준비된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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