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만한 아우없다는 말이 잇던데여??
"형만한 아우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형이 먼저 태어나 인생 경험이나 노하우가 많으니 동생이 형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즉, 형이 아우보다 100% 우수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속담은 장유유서와 같은 형제 서열을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형제 사이에 형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규범이 있기에 형이 아우보다 낫다는 속담이 굳어진 셈입니다. 또한 형이 아우를 돌보고, 가르치고, 잘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형의 책임감을 강조하려는 유교적, 가족적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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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인간 사회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나요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나 다툼이 없었던 시기는 없었습니다. 역사는 전쟁의 기록이 많습니다. 국가, 민족, 종교, 지역간 갈등으로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역사에 기록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본능상 갈등과 전쟁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한 전쟁은 지도자의 이기심, 자원 및 영토, 경제적 이익 다툼 등으로 일어납니다. 전쟁이 없는 사회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희망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전쟁이 한번도 없는 상태는 역사상 없으며,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생존을 위해 전쟁을 방지하거나 줄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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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에는 한글이 발명이 안됐었는데 어떻게 말했나요?
훈민정음이 발명하기 전에도 말(언어)은 현재처럼 우리민족의 언어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즉, 언어는 있었지만 문자가 없어 한자를 빌려서 표기하는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자와 우리 언어가 다르기에 한자를 빌어 향찰, 이두, 구결과 같이 변형하여 문자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훈민정음은 1446년 우리말(언어)를 표기 위해 세종대왕이 발명한 문자입니다.즉, 고려, 조선시대에도 중국어를 말을 하지 않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와 비슷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다만 글을 슬때 한자 또는 한자를 변형하여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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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1960년대에는 무근 머리가 유행이었나요?
1960년대 서양에서 여성은 부팡 스타일, 플립스타일, 픽시컷 등이 유행했습니다. 부팡 스타일은 머리 윗부분을 높게 부풀리고 둥글게 만든 스타일이며, 플립 스타일은 중간 길이 또는 짧은 보브컷으로 끝을 밖으로 말아올린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픽스 컷은 아주 짧은 남성적 숏컷입니다. 그리고 남성들은 비틀즈 맴버 처럼 짧은 앞머리, 양옆과 뒤통수는 짧게, 위쪽은 살짝 길게 내린 머리 모양이 유행했습니다. 그외에도 클래식 숏컷, 히피, 장발 스타일이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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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때 노비들은 정말로 양반들 마음대로 가능했나요??
조선시대 노비는 사적 소유,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비라도 주인맘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결혼은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 규범상 노비는 노비끼리만 가능했스니다. 양천교혼이 원칙적으로 제한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양인과 노비 간의 혼인이 있는 경우가 있었으며, 그래서 정부에서는 노비종모법, 노비종부법을 제정하여 자녀의 신분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노비는 양반, 관료의 집안에서 직접 노동하는 솔거노비였으며, 외거노비는 신공을 주인에게 제공해야 했습니다. 결혼, 노동, 삶 전반에서 노비는 주인공의 영향력이 크고, 극단적인 억압을 겪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인 맘대로 노비를 완전히 무제한으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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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을 향한 해외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지만 북한 당국은 국제적인 관심을 끄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피할 거라는 평가입니다.
질문의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네요. 북한은 국제 사회가 북한이 단순히 냉혹한 독재국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도 보이는 곳이라는 인식을 전달하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이런 이미지를 홍보하고, 확산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 독재국가라는 이미지를 조금 완화시키고, 오랫동안 선전용 소재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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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에 대한 간략한 질문입니다.
미국이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이유는 우선 이란의 핵과 미사일 위협 차단을 위해서입니다.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와 중거리 미사일 능력을 키우면, 중동의 동맹국인 이스라엘, 사우디, 페르시아만 국가들에게 위협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동맹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동맹국 방어 차원에서 이란을 공격한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패권과 중동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미국이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란의 성장을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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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국민구휼제도를가르쳐주세요!!
고려시대에 백성들을 위한 구휼제도로 우선 의창제도가 있습니다. 본래 태조 왕건이 흑창을 시행했는데, 궁핍한 백성들에게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도록 하는 진대제도입니다. 그런데 성종 5년 기존의 흑창의 기금을 쌀 1만석을 보충하면서 의창으로 바꾸고 정비했습니다. 개경과 각 군현에까지 확산되며 조선시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원(절)에서도 구휼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원들이 의창의 기능과 더불어 의료 구호, 노약자, 병제를 절에서 구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5대 진휼 사업으로 '은면지제'가 있는데, 이는 국가의 경사나 평화시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재면지제'는 가뭄, 홍수, 화재 등 재난이 발생하면 조세, 부역을 감면, 면제해주는 제도로 운영되었습니다. 환과고독진대제도는 홀아비,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에게 곡식을 대여해주는 제도이며, 수한질여진대지제는 홍수, 가뭄, 역병 대 곡식과 약품 등을 나누어 주는 제도입니다. 또한 납속보관지제라고 하여 곡식을 많이 납부하는 자에게 관직을 보상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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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들은 왜 실록을 직접 볼 수 없었나요?
조선왕조실록은 국왕이라도 열람할 수 없게 하여 기술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실록은 왕의 말과 행동, 조정 회의, 정책 결정을 그대로 사관이 기록합니다. 그런데, 만약 실록을 자유롭게 열람하면 자신이나 부모의 기록을 훼손하고, 왜곡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물론 실록의 바탕이 되는 사초를 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와 같은 행동까지 사관이 사초에 기록하여 실록에 반영하였을 정도로 객관성이 보장되었습니다. 또한 국왕도 자신의 통치가 어떻게 기술될 것인지 두렵게 하여 신중한 통치를 하도록 한 의도도 있었습니다.이와같은 실록의 편찬의 객관성 보장 덕분에 실록은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습니다. 즉, 실록은 사관의 직필을 보장하고, 왕권의 직접적 개입을 차단해 최대한 사실에 가까운 기록을 남기려는 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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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근초고왕의 업적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근초고왕은 4세기 백제를 삼국을 주도하며 전성기로 이끈 국왕입니다. 그는 우선 부자상속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북쪽으로는 황해도를 차지하고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케하였습니다. 또한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고, 왜와 통교하면서 동아시아 교역을 주도하였습니다. 특히 아직기, 왕인 박사를 일본에 보내 백제 문화를 전파하였습니다. 또한 고흥에게 역사서 <서기>를 서술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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