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서양판 진시황릉이라는 미우솔레움의 실존성은 어떻게 밝혀졌나요?
마우솔레움은 고대 소아시아사 할리카르나소스(현 터키 보드룸)에 세워진 거대한 무덤으로 기원전 4세기 카리아의 왕 마우솔로스를 위해 그의 아내 아르테미시아가 건립되었습니다. 이 무덤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며, 마우솔레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대한 왕릉을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될 정도였습니다. 1856년 영국의 고고학자 찰스 뉴턴이 터키 보드룸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높이는 43미터, 대리석으로 기단과 신전, 기둥, 조각상, 그리고 꼭대기 마차상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규모는 진시황릉이 더 크지만 마우솔레움은 그리스, 페르시아 예술의 융합, 조각, 건축의 아름다움, 그리고 고대 불가사의로서의 상징성이 매우 높습니다. 도굴과 파괴로 인해 완전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외부 유물과 기록으로 실존과 위용이 충분히 확인되었습니다.
Q. 니콜라스 반 렌스버그의 정체와 그가 했다는 예언들은 맞아 들었나요?
니콜라스 반 렌스버그는 186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난 네덜란드 계 보어인 출신 예언가입니다. 그는 공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주로 목축업에 종사하다가 1899년 보어전쟁을 계기로 예지력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911년부터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미래에 관한 환영을 자주 경험했고, 그의 딸이 기록해 책으로 남겼습니다.니콜라스 반 렌스버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예언가로, 주로 보어전쟁 등 남아공 관련 사건을 예언해 일부 적중했다고 평가받습니다.그러나 그의 예언은 상징적이고 모호해, 세계적 사건에 대한 적중 여부는 사후 해석에 크게 의존하며 명확히 맞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Q. 임진왜란 시기 큰 전투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을까?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퇴로를 차단한 뒤 학익진 전법으로 포위 공격하여 격퇴한 전투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신중한 판단, 지형, 해류 활용, 철저한 준비 등이 승리의 요인입니다. 이 전투를 통해 조선은 남해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일본의 수륙병진 작전을 차단시켰습니다. 진주대첩은 진주 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과 의병이 힘을 합쳐 성을 방어했습니다. 김시민이 성과 지형, 군민 협력으로 수적 열세 극복, 남부 내륙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김시민의 지도력, 군민 일치단결, 외부 지원군의 합류가 결정적입니다. 행주대첩은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3만명의 일본군의 포위를 받으며 배수진을 치고 방어했습니다. 권율의 격려와 통솔, 군민의 결속, 화살·돌 등 다양한 무기 활용, 보급로 확보가 승리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승리로 조선군 사기가 크게 회복되고 일본군은 한양에서 휘퇴되며 전세가 조선에 유리하게 전환되었습니다.
Q. 오키나와에 있는 세계문화유산과 그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주세요.
오키나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은 류큐 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 유산군으로 2000년 등재된 곳은 9곳의 유적지입니다. 이 유산들은 14~19세기 독립국이었던 류큐 왕국의 독자적 역사, 문화, 종교, 건축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슈리성터, 나키진 성터, 자키미 성터, 카스렌 성터, 나카구스 쿠성터, 소노한우 타키 석문, 다마우둔, 시키나엔, 세이화우타키에 해당됩니다.
Q. 보물이 실제로 바다나 무인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발견이 거의다 되었을까요?
아직도 바다와 무인도에서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상당하 많습니다. 전 세계에 100만척 이상의 난파선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며, 이 중 대부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해양 유산 전문가에 따르면 지구 표면의 70%가 바다이고, 인간이 실제로 접근해 조사한 해저는 5%에 불과합니다라고 언급할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1511년 말라카 해협에서 침몰한 포르투갈의 ‘플로르 데 라 마르(Flor de la Mar)’ 호가 있습니다. 이 배에는 오늘날 가치로 약 2조 원에 달하는 보물이 실려 있었으나, 수많은 탐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Q. 현대 이슬람 사회에서 세속주의와 종교주의의 갈등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건가요?
현대 이슬람 사회에서 세속주의와 종교주의 간의 갈등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정권이 교체되거나 대규모 시위와 내전 등으로 정치적 충돌이 빈번합니다. 그리고 샤리아 도입, 복장, 음주 규정 등으로 율법 때문에 충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복장, 음주, 성소수자 권리, 예술 문화 등에서 이슬람적 전통과 현대적 서구적 가치관이 충돌하며, 때때로 시위, 항의, 사회적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Q. 오스만 제국이 과거 이슬람 제국중 가장 강성하고 위대한 제국인가요?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역사상 가장 강성하고 오랜 기간 존속한 대표적 제국으로 평가받습니다.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세계에서 최대, 최장수면에서 독보적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통치했으며, 최전성기에는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었습니다. 17세기 초에는 32개 지방, 수많은 봉신국을 거느렸고, 수도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지중해 세계의 중심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