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통리기무아문이 한 역할이 무엇인가요?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 12월 개화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최초의 근대적 행정 기구입니다. 12개 부서를 두어 외교, 군사, 통상, 번역, 어학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주요 역할을 외교 및 통상 업무 총괄, 군사 및 국정 전반 관리, 그리고 개화정책의 추진을 주도하였습니다.특히 청에 영선사와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화폐 주조, 금은 광산 개발, 홍삼 관리 등 국가 재정 확충과 경제 개혁을 담당했습니다.
Q. 당나라는 중앙정부가 각 지방을 어떻게 통치했나요
당나라 중앙 정부가 각 지방을 10~15개의 "도"로 나누고, 그 아래 "주", 그리고 "현"을 설치하여 관리하였습니다. 각 주와 현에는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의 자치와 권력의 집중을 막았습니다. 지방관은 중앙 정부에서 직접 임명하고, 자신의 출신지에는 부임하지 못하게 했으며, 일정 기간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켜 지방 세력과의 유착을 방지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군사력이나 사병 보유도 엄격히 제한했습니다. 그 외에도 당나라는 도로망, 역참, 운하 등을 활용하여 지방을 관리하였습니다. 또한 중앙의 감찰관이 지방을 순시하며 관리의 부정·비리를 감시했고, 지방의 세금·공물은 중앙으로 직접 보고·납부하게 했습니다.
Q. 조미수호 통상 조약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의 영향으로 미국과 조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을 해야하며, 개화정책 추진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정부의 미국과 수교, 개화 정책의 필요성을 대두된 것입니다.1882년 청은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알선하여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주요 내용은 거중조정, 관세 조항, 그리고 최혜국대우와 영사재판권이 포함되었습니다.
Q. 유길준과 부들러의 중립화론은 무슨 주장을 하나요?
1884년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들의 침략 경쟁이 확산되면서 일부에서 조선 중립화론이 제기된 것입니다 . 갑신정변 이후 청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조선은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었던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1885년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 청, 러시아, 영국의 침략 경쟁이 심화되자 독일의 부영사 부들러, 개화 정치가 유길준은 조선을 중립화하자라는 주장을 내세운 것입니다
Q. 1868년 병인양요의 발생 과정은 무엇인가요?
1866년 병인양요 발발 원인은 병인 박해입니다. 병인박해는 1866년 흥선대원군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동맹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습니다. 오히려 누적된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12명의 선교사 가운데 9명이 사망하였으며 수천명의 신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병인박해 사실을 전달하면서 군사적 응징이 결정된 것입니다. 9월은 함대 3척이 양화진까지 정찰하고, 10월 1000명의 병사와 7척의 함대가 침략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한성근, 양헌수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한 달간 강화도를 점령했으나, 정족산성 패전과 병참 문제 등으로 11월 10일 철수했습니다. 철수 시 조선의 문화재와 은괴 등을 약탈해갔습니다.
Q. 한반도에서 불교가 처음 도입되던시기와 어떤식으로 대중화가 되는건가요?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입니다. 삼국은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국가 통합을 위해 불교가 필요하였습니다. 고구려는 4세기 소수림왕 당시 전진의 순도, 백제는 4세기 동진으로 부터 마라난타, 그리고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당시 수용됩니다. 단 신라는 그보다 일찍 전래되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됩니다.당시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이 수용하는데, 왕실은 왕즉불 사상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족들도 업설을 통해 신분제의 정당성을 강조했습니다. 통일신라 중대에 들어서 대중화됩니다. 특히 원효와 의상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각기 아미타 신앙과 관음신앙을 보급하면서 불교 대중화에 이바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