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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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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금속활자의 혁신적 개량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려의 금속활자가 서양봐 훨씬 이른 가장 빠른 금속활자인쇄술이었는데 한반도의 금속활자인쇄술이 개량되는 수준을 넘어 보다 더 혁신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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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활달한파리매77
      활달한파리매77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한반도에서 더 이상 금속활자의 혁신적인 개량이 없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의 쇄국 정책

      조선은 16세기부터 쇄국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쇄국 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금속활자도 서양에서 발전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혁신적인 개량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주자학의 영향

      조선은 주자학을 국교로 삼았습니다. 주자학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유교 사상입니다. 주자학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이 낮았습니다.


      금속활자의 완성도

      조선의 금속활자는 이미 매우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국의 금속활자보다 더 작고, 더 정교했습니다. 이러한 완성도 때문에, 조선에서는 금속활자의 개량에 대한 필요성이 낮았습니다.


      물론, 조선에서도 금속활자의 개량을 시도한 사례는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8세기 초에 만들어진 "훈민정음 석각본"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석각본은 훈민정음의 자모를 돌에 새겨놓은 것으로, 기존의 금속활자보다 더 정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량은 일회적인 시도에 그쳤고, 이후에는 더 이상 금속활자의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한반도에서는 더 이상 금속활자의 혁신적인 개량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는 기술적으로도 생산성이 목판 인쇄에 비해 심하게 낮을 정도로 미흡했던 부분이 많았습니다.

      금속활자가 최초 발명된 13세기까지 활자끼리 맞물리게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미흡해 밀랍으로 두 활자를 붙여서 찍어내는 불완전한 방식을 채택했으므로 한번에 통째로 찍어내는데 무리가 많았습니다. 금속 주조 능력의 부족으로 글자의 모양이 바르지 못하고 획의 굵기가 불안정했으며 인쇄 중 흔들림이 많아 글자가 번지거나 흐려지는 경우가 많았고, 많은 양을 찍지 못하고 중간중간마다 밀랍을 부어 재조립해야했습니다. 이때까지도 금속활자 한판을 가지고 하루에 찍어낼수 있는 양은 하루에 열장도 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 시대 직전까지도 비슷한 방식이 유지, 민간이 아닌 국가 주도의 개발로 금속 주조 능력 자체는 발전하여 활자의 맞물림이 비교적 발전되나 하루에 20장 인쇄 정도였으며 세종 시대에 갑인자가 개발되어 활자를 조립식으로 바꾸고 활자의 틈새를 대나무로 메꾸는 등 더 발전했음에도 하루에 40장이 한계, 이는 조판 과정을 제외한 인쇄 속도를 말합니다.

      조선 시대 활자의 내구성이 개선되었음에도 생산성이 이상할 정도로 낮은 것은 인쇄방법의 문제로, 활자 위에 먹물을 바른 다음 종이에 그 위를 덮고 문지르는 방법인데 이 과정을 손으로 하다보니 종이가 흔들리거나 문지르는 강도가 잘못되거나 먹의 농도가 잘못되면 글자가 번지거나 흐려졌습니다.

      또, 주로 한자로 된 활자였으므로 아무리 글자당 한 개씩만 만들더라도 수천수만 가지 종류의 활자가 나오는데 이걸 일일이 맞춰 인쇄를 하기에는 불편했고 인쇄과정에서 중복되는 글자도 있으므로 대량인쇄는 어려웠습니다.

      한자를 실질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계층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충분한 지배층이나 거상, 부농같은 소수에 국한되었고, 서양에서 활자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보편된 시기는 문자교육이 확대되며 피지배층내에서도 책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던 시기와 맞물리며 수요자체가 지배층에 국한되면 굳이 책을 대량생산할 필요가 없어 필사정도로 충분히 그 수요에 만족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