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반대한 사람은 최만리 인가요?
현재도 한글을 쉽게 읽고 쓸 수 있고 이해력을 높이고,
한글을 잘 만든것 같은데요.
근데 당연하게 찬성된 줄 알았는데 최만리 한분만 왜 반대 하는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1444. 2. 20)에 최만리 등의 상소 기사가 있습니다.
훈민정음을 백성들에게 반포하려 했을 때 최만리, 정창손 등 7명의 집현전 학자들과 신하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그 중 가장 강력히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사람이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였다고합니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큰 나라를 모시는 예의에 어긋나며,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설총의 이두가 있는데 굳이 언문(훈민정음을 낮게 부르는 말)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글이 있어도 백성들의 원통함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않습니다"라고.
상소문에는 대표로 최만리 등이라고 썼지만
왕과의 토론에는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집현전 학사 7인이 나왔다고합니다.
한자를 대신하여 언문을 쓰는 것에 지식층 대부분이 반발했던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집현전의 일부 학사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최만리를 필두로 하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중국의 문자를 버리고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오랑캐나 할 짓이라며 반대의사로
선봉에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가
있었다. 최만리는 어떤 사람인가? 조선 초기
유교주의 국가 정립에 토대를 마련한 학문연구기관 집현전 출신이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로 1년 나가있었던 것 말고는 그의 관직생활
25년간을 집현전에서만 오로지 근무해
부제학까지 오른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민정음에 반대세력은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내용은
1.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2.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은 하나같이 오랑캐들 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3. 새 글자는 이두보다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4.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 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5.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 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6.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하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큰 이유는 양반들의 기득권 보존으로 어려운 한자와 한문을 익힌 사람만 양반, 벼슬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만리 혼자 훈민정음을 반대한 것을 아닙니다.
최만리는 집현전의 부제학으로 그가 주동자이며,
그를 따르는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 아래 관원들입니다.
이들이 반대한 까닭은 지식인들의 전유물인 한자가 아니라
한글 통용으로 백성들이 깨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집현전 학사 중에 최만리만 한글 창제에 반대해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라 최만리와 그의 학사 7명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당시의 식자층이라고 할수 있는 유학자들은 대부분 한글 창제에 대해서 대부분 불편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만큼 중국에 대한 사대 정신이 강했던 사람들이고 중국의 한자를 배우고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길이라고 철저하게 믿었던 사람들 이였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세종은 외로운 싸움을 혼자 해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만리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반대하던 인물이 맞습니다. 그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일이고, 논의도 없이 갑작스럽게 글자를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한자와 방식이 다른 문자라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최만리만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을 사대하고 있었습니다. 속국까지는 아니지만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요. 당시 명나라는 조선이 자신의 글자를 가지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명나라만이 하늘을 관측 할 수 있고 글자를 가질 수 있고
중국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중국의 것을 도용하여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하고 한글을 만들면 조선에 국난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이를 경계하고
반대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엄재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훈민정음은 조선 세종(世宗)이 1446년(세종 28) 9월에 제정·공포한 한국의 문자입니다
사대사상에 젖은 일부 관리들은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였고 특히 최만리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최만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조선에서 활동한 사학자로, 한글의 현대적인 표기법을 제안한 이들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글의 모음을 ‘운’으로 나타내는 방식을 비롯한 일부 표기법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최만리는 한글의 표기법이 단어의 발음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악어'라는 단어를 보면, '악'이라는 초성은 발음되지 않고 '어'라는 종성이 끝에 발음되기 때문에, 초성 중심의 표기법인 한글의 표기법이 단어의 발음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최만리의 주장은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었고, 최근에는 한글의 발음과 표기법을 고려한 현대적인 표기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글의 표기법에 대한 최만리의 반대 의견은 한글 표기법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지만, 현대 한글 표기법의 기반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데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중국에 사대를 하는데
잘 못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중국 글자 아닌것은 다 오랑케들이 하는 것이라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민정음을 백성들에게 반포하려고 했을 떼 최만리, 정찬손 등 7명의 집현전 학자들과 신하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궁궐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그 중 가장 강력히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사람이 집현전 부제학 이었던 최만리 였습니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큰 나라를 모시는 예의에 어긋나며,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글이 있어도 백성들이 원통함을 푸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게다가 신하들과 상의 없이 문자를 보급하는 것은 절차상 맞지 않습니다” 라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훈민정음을 반대한 사람으로는 최만리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만리는 훈민정음을 반대하면서 이를 비판하는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최만리는 당시 한글을 배우던 사람들에게 어려운 점이 많았고, 중국의 문자 체계와 달라서 유학생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며 훈민정음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매우 혁신적인 조치였고, 한글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최만리의 반대와 비판은 그 당시에는 일부 인물들 사이에서만 주목받았고, 훈민정음이 한글을 가르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 역할과 의의이 크게 인정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한자가 당시 기득권층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해주는 언어 장벽의 일종이었고( 한글이 없는 것이 백성들을 소위 관리하기 편하므로 ), 최만리가 반대하긴 했지만 기득권을 갖고 있던 신하들은 대부분 반대를 했다(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 )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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