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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0.09.11

졸업식때 밀가루나 달걀(계란)을 던지는 이유가 뭐죠? 뭐 특별히 기원이 잇나요?

값싸고 티가 많이 나서 그런건가요?
왜 하필 그런걸 던지나요?
그냥 언제부턴가 그런 흐름이 잇엇는지
아니면 기원이나 의미가 잇는건지 궁금하내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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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옛날 중·고등학교 졸업식 때에는 어김없이 밀가루가 등장했지만, 어쩐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의 졸업식에는 아무런 이벤트도 없었다. 일제 시대에 만든 교복을 여전히 입던 시절, 몇몇 졸업생들은 어김없이 밀가루 파티를 열었다. 밀가루를 먹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를 검은 교복에 뒤집어쓰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교복 화형
    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교복이 없어졌기 때문에 내 졸업식 때에는 교복 화형식을 구경할 수 없었지만, 선배들의 졸업식에서는 그 같은 진풍경을 여러 번 구경했다.

    교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너는 학생이다’라는 낙인(烙印)과도 같아서 학생들에게는 폭압의 상징이었다. 교복에 학교 배지나 학년 배지를 달지 않으면 정문 앞에 서서 손들고 서 있어야 했고, 모자를 쓰지 않거나, 목 부분의 호크를 채우지 않아도 벌을 받아야 했다. 교복 때문에 시내에 나가면 선생님들에게 눈에 단박에 띄었다. 학생들은 교복만 없어도 훨씬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텐데, 교복을 입고 참으로 답답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졸업생들은 교복이
    라는 억압적인 코드에 대해 밀가루를 뒤집어씀으로써 일축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밀가루였을까? 교복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규범적인 검은색의 효능을 가장 효과적으로 백지화할 수 있는 재료가 허연 밀가루였다. 결국 밀가루 뒤집어쓰기는 이제 내가 학생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성인으로서 어엿하게 살아가겠다는 반항적인 독립선언이었던 셈이다.

    당시 밀가루 뒤집어쓰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어른이 많았지만,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조선 시대의 관혼상제(冠婚喪祭) 의식 중 관례(冠禮)와 비슷하다. 관례란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며, 남자만 행할 수 있다. 여자의 경우 오직 혼인을 통해서만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남자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리고, 머리에 복건(僕巾)·초립(草笠)·사모(紗帽)·탕건(宕巾) 등의 관(冠)을 씌우는 의식을 행했다. 이 의식에는, 관을 씀으로써 어엿한 사회 구성원이 된 이는 예의를 잘 지키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른들의 주도 아래 엄숙하게 치러졌던 관례 의식이 아이들 스스로가 난장판을 벌이면서 행하는, 교복에 밀가루 뒤집어쓰기로 변형되었다는 것은 참으 로 재미있는 일이다.

    요즘에는 밀가루 뒤집어쓰기 풍조가 거의 사라졌지만, 졸업식은 여전히 관례로서의 구실을 한다. 특히 졸업생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사회에 진출해야 할 경우, 그의 졸업식은 정말 중요한 관례 의식이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부모님이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얼마 안 되는 논밭에 농사를 지으며 자식을 도시로 유학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보다 부모님이 자식의 졸업식을 보면서 훨씬 감격스러웠으리라. 나는 당시 서울로 올라가기로 한 결정을 포기하고 지방 대학의 특별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동안 부모님을 고생시킨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이제 더 이상 뼈빠지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고생시켜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 영원한원앙265
    영원한원앙26520.09.12

    일제강점기 시기에 한국학생이 일본의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 졸업을 하는것을 부끄럽게 여겨 졸업식날 그 표식을 가리기 위해 처음으로 시작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러한 행동이 아직까지 내려오며 존재했던 것인데 지금 이러는것은 그 시절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 같고 보편적으로 보기 불편한 행동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