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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재규어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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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기녀들의 시조는 연애편지될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의 시조는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였잖아요~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정서보다는 유교관념을 전달하고자 했는데 그런데 기녀들이 애정 및 인간의 정서표현을 하였다고 하는데요~ 기녀들의 시조는 연애편지가 될수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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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녀는 신분은 가장 미천한 천민이지만 사대부와 어울릴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시조를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이 시조는 기생 홍랑이 지었습니다.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의 손에 보내면, 임께서 그 가지를 창밖에 심어 두고 보다가 새 잎이 나면 그것을 자신으로 알아봐 달라는 간곡한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기녀는 누가 뭐래도 황진이일 것입니다. 그녀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얼굴이 아름답고 시를 잘 지었으며 글씨도 뛰어났고 음악에도 재주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녀는 서경덕, 임제를 비롯하여 당대에 뛰어난 문인, 유학자 들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 대표적인 기녀가 바로 황진이인데 그녀는 「박연」,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을 지은 조선 전기의 기녀 입니다. 이렇게 기녀들은 자신의 시조에 애정및 자신의 감성을 실어 시조를 짓기도 했습니다.

  • 시조의 작가로 기녀들이 나타나게 된 것은 조선 전기, 중기 시기까지 사대부들이 주로 평시조를 창작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후기로 오면서 가객, 평민층, 기녀로 작가층이 확대되는 시기부터입니다. 기녀들의 시조에는 여성화자의 세련된 표현이 나타나고 순수한 우리말 표현들이 자주 나타난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시조가 관념적이고 유교적, 도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면 기녀시조에는 인간 본연의 정서를 솔직, 담대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 사설시조가 내용과 형식에 모두 변화가 나타났다면 기녀시조는 형식을 그대로인채 내용만 변화하였습니다. '묏버들 갈해 것거~', '이화우 흣뿌릴제'(계랑), '동짓달 기나긴 밤을'(황진이' 등의 시조를 보면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의 그리움을 말하고 있어 연애편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화우 흣부릴제는 계랑이라는 기녀가 자신과 사랑했던 유희경이란 선비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기도 합니다.

  • 예전에는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사랑을 나누는 연애편지보다 한시를 지어 마음을 담는 일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글을 공부한 기녀들의 경우 신분이 높은 손님들과 한시를 지어 글로 마음을 전하거나 만났을 때도 마음을 싯구로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황진이와 매창의 경우에도 한시와 시조를 많이 지었습니다. 황진이는 서경덕에 대한 사랑을, 매창은 유희경, 이귀와 연인이었는데 서로를 향해 지은 시조가 가히 당대 문인들과 겨줄만한 수준이라고 당대 최고의 시 비평가였던 허균이 극찬했다 합니다.

    이렇듯 시와 시조로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였으니 연애편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