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물고기 어획량은 어느정도였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어획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낚시나 그물, 통발 등을 이용해야만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을텐데요. 당시 어획량은 어느정도 였는지 기록되어 있나요? 그리고 그럼 어획량이 적으니 언제든 물고기를 잡는데 어려움은 없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어업은 숭불사상의 쇠퇴, 면업의 발달에 의한 면망의 도입, 인구 증가로 인한 수산물에 대한 수요 증가 등에 의해 발전할 수 있는 요인이 조성되었으나, 문헌이 전해 주는 바를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에 비해 단순한 양적인 확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어업의 사정을 알려 주는 문헌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임원십육지』·『자산어보』 등 상당수를 헤아릴 수 있다.
이들 문헌을 통해서 우리들이 미루어 판단할 수 있는 바는, ① 수산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② 어업이 동남서해안에 걸쳐 광범하게 영위되었으며, ③ 어획량 또한 상당량에 달하였다는 점이다.
첫째,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수산물의 종류와 수가 한말에 간행된 『한국수산지』(1908)에 나오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즉,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어류 44종, 패류 12종, 해조류 19종, 기타 수산물 13종, 모두 합하여 98종(그 밖에 가공품 및 기타 24종이 기록되어 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보다 80년 뒤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어류 51종, 패류 16종, 해조류 13종, 기타 15종, 모두 합하여 95종으로 거의 같다.
한편, 한말의 『한국수산지』에는 어류 60종, 패류 18종, 해조류 6종, 해수류 6종, 기타 10종, 모두 합하면 103종이 기록되어 있어 그 사이에 큰 차이는 볼 수 없고, 다만 해수류가 따로 분류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만을 읽을 수 있다.
둘째,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어량의 분포상을 보면, 충청도 136개 소, 황해도 127개 소, 전라도 50개 소, 경기도 34개 소, 경상도 7개 소, 함길도 2개 소로 기재되어 강원도와 평안도에는 어량이 없는 듯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안도의 여러 곳에 어량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비록 밀도의 차이는 있으나 동남서해안의 전 해역을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 나라 전체 해면에서 광범위한 어업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어량의 분포상을 보면, 충청도 136개 소, 황해도 127개 소, 전라도 50개 소, 경기도 34개 소, 경상도 7개 소, 함길도 2개 소로 기재되어 강원도와 평안도에는 어량이 없는 듯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안도의 여러 곳에 어량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비록 밀도의 차이는 있으나 동남서해안의 전 해역을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 나라 전체 해면에서 광범위한 어업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영조가 박문수(朴文秀)를 충주목사에 임명하여 삼남의 어염(漁鹽)을 관장하게 한 뒤 “삼남의 어염 소득이 얼마냐?”고 묻자, ‘10만 냥에 모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거기에는 염업 소득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1863년(고종 1)의 우리 나라 해세(어염선세) 총액이 7만8233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적은 금액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요, 그만큼 어업이 성황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조선시대에도 우리의 어업은 한결같이 어로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었을까. 바꾸어 말하면, 수계에 적극적으로 노동을 가해 생육과 번식 보호를 촉진시켜 그것을 채포하는 양식업은 없었던 것일까. 이미 1세기경에 잉어를 못에서 길렀다는 점을 지적하였거니와, 조선시대에도 태종 때부터 연못에서 잉어를 기르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다에서 어류와 패류를 양식한 것은 한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한말에 광양만 내의 섬진강 하구에서 굴을 양식했고, 여자만 내의 장도(獐島)·대포(大浦)·하대진포(下大津浦) 등지에서 고막을 양식했으나 그 규모가 작고 일종의 축양 정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천연패류가 풍부한 당시로서는 굴을 애써 양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태양식은 일찍부터 개발되어 상당히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다.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지리지인 『경상도지리지』 동평현·울산군·동래현·영일현·안동대도호부의 토산공물조에 해의(海衣)라는 이름으로 해태가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560여년 전에 우리 나라에서 해태가 채취, 식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