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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함23.11.21

고려가 거란전쟁시 막을 수 있는 이유와 거란이 왜 끈질기게 고려를 침략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는 외침으로 인해 핍박 받았지만, 우수한 문화도 꽃 피웠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해서 강력한 이미지가 있는데, 기병이 우수한 거란족을 물리쳤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거란과 전쟁 시 승리 이유와 거란의 침략 명분이 궁금합니다. 왜 고려를 침략해서 국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얻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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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란과의 관련은 고구려때부터이지만 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습니다. 이때에는 거란도 부족분열 상태로부터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 중 거란족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를 건국, 922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거란에 대해서 금수지국이라 부르고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북진 정책을 실행합니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 30인은 섬으로 유배, 낙타는 마부교에서 굶겨 죽입니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졌고, 그 뒤에도 계승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광군 30만명을 양성하였고 광종 때에는 서북쪽에 맹산, 숙천, 박천, 문산 등 청천강 유역과 동북쪽으로 영흥, 고원 등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갖추고 , 또 광군을 관군사로 개편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공과 화친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한편 975년 통일을 이룩한 송나라가 985년에는 고려에 한국화를 보내어 거란 협공을 제의 , 송나라는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과 해상을 통해 내왕하며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따라서 거란으로서는 고려의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요 태종이 오대의 첫번째인 후량과 후당의 싸움에 끼어들어 연운십육주를 얻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끝내 중국 남침에 실패하고 급사한 뒤 , 수구파와 진보파의 대립과 정치싸움으로 고려와 겨룰 여유가 없었으나 982년 이후 정국이 안정되었습니다. 요 성종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 진화, 내원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