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광수는 어째서 친일파가 되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 이광수의 무정이라고 하는데요~ 소설과 이광수는 어째서 친일파가 되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권태형 전문가입니다.
일단 일본의 세력이 매우 강력했으며 옥중에서 거의 사망에 가까운 질병을 겪고 있었고, 차라리 일본에 충성하는게 국민을 위한다고 착각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전문가입니다.
소설가 이광수는 상하이에서도,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된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전쟁 중인 일본 병사들에게 위문대·위문문 보내기를 주도하였다고 합니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며 황민화운동을 지지하고 창씨 개명을 사람들에게 종용하며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로 바꾸었고 그 이유도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또다시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미중의 애국운동을 쓰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고 영미를 타도 격멸하라는 주제로 강연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글도 올리고 청년들에게 군대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최남선과 함께 일본 주재 한국인 유학생에게 입대를 권유했던 선배 격려대입니다.
왜 갑자기 명확하지는 않지만 투옥된 기간에 생명을 위협을 느끼고 살기 위해서 일제에 협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이광수이지만 마지막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이광수의 스승인 안창호는 이후 옥고를 치르다 간경화로 죽는데 안창호의 죽음은 이광수에게 큰 충격과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는 것 같습니다. 당시까지 애국적인 면이 강했던 이광수의 사상은 자치든 뭐든 불가능하니 당시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일제에 충성하자로 변질 된다고 합니다. 즉, 일본인이 되어 총독부의 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맡으며 문학계 친일인사들 중 가장 압도적인 분량의 친일문학을 남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내선일체와 조선 문학>,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 <폐하의 성업에>등과 같은 작품이 바로 친일파 작품 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에녹 전문가입니다.
소설가 이광수가 활동하던 시기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많은 지식인들은 일제의 억압적 통치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했습니다. 일부는 무력투쟁을 선택했고, 다른 이들은 문화적 저항을 시도했으며 또 일부는 현실적인 타협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광수는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민족주의적 활동을 했지만, 점차 일제의 압력 속에서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광수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민족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각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3.1운동 이후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광수는 독립운동의 한계에 대한 실망과 회의감을 느끼고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광수는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일본 당국과의 타협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활동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자 하는 욕망이 친일활동을 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광수는 1930년대에 더욱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보이게 됩닏. 내선일체, 황민화와 같은 친일적 이념을 받아들이고 조선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 제국의 체제에 순응하고 일본의 문명화와 근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은 조선의 독립보다는 현실적인 생존과 발존을 도모하려는 그의 논리였습니다.
일제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과 문학활동, 사회적 지위를 위해 일제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활동을 한 이광수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관점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변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