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정한론의 과정에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이 대두되게 된 최초의 이유는 1868년에 일어났던 국서 거부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외교의 방식도 서구적으로 변경하였는데, 기존의 쇼군으로 부터 오는 국서가 아닌 천황이 직접 발신하는 방식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언뜻 보면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이나,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일본과의 외교도 쓰시마 도주를 통해서 진행해온 터라 일본이 직접 "천황(황제)"를 칭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국서를 그대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와 조선 정부는 외교적으로 큰 마찰이 생기게 됩니다.이후 일본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정한론을 주제로 대립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메이지 6년 정변입니다. 당시 정한론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라은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있었고, 반대파로는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 등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정한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던 사람들은 사표를 내고 실각하게 되고, 이후 반정부 세력을 형성하기도 합니다.한편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도 정한론자로 보기도 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을 정벌한다기 보다는 "같이 근대화 하여 일본과 같아져야 한다"를 처음에 주장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갑신정변의 실패를 보고 나서, 조선에서의 근대화가 아닌 일본으로부터의 근대화로 노선을 바꾸면서 정한론자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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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의 문자는 어떻게 해석을 할 수 있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수메르인들은 쐐기 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쐐기문자에 대한 기원은 추측이지만, 처음은 그림에서 시작한 상형문자로 시작하여 쐐기모양의 고대 문자로 변형되었다고 현재 해석하고 있습니다.고대 문자에 대한 해석은, 암호 해석과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자주 사용하는 문자들을 조합하고, 또 해석이 되어 있는 일부 글자들을 조합하여 해석을 진행합니다. 당시의 문자는 글자 하나에 뜻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현재 해석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 이라는 문장이 있을 때, ★의 뜻이 쌀 이라는걸 알고, ※가 일기 같은 기록 처음에 자주 나와 나라고 가정, #은 다른 음식 뒤에 많이 붙어 있는거로 해석하여 "나는 쌀을 먹는다"로 해석하는 식입니다.현대어는 단어 하나에 다양한 철자들이 들어가 있지만, 고대 문자는 상형문자의 개념이 많았기에 "한 문자에 하나의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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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한국사 공부를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신다면, 강의를 듣는 걸 추천드립니다. 시험을 위하여 한국사를 공부하실때 많은 양과 깊이가 있어야 하기에 독학으로만 공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위해서 공부하신다면, 최태성 선생님 강의가 가장 인기가 있습니다. (책만 구매하면 강의는 무료로 알고 있습니다.) 그외에 공무원 한국사로 유명한 문동균 선생님 강의도 괜찮습니다.만약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시는게 아니시라면, 개인적으로는 한국사 만화책으로 공부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중학교때 재미로 읽었던 한국사 만화책이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장면으로 기억이 납니다. 기억에 많이 남으려면 재밌게 공부하는게 최고라고 생각하기에, 만화책으로 입문하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허순봉 선생님의 만화로 보는 00왕조 000년 시리즈가 개인적으로는 최고였습니다. (만화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만화로 보는 고려 왕조 500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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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고구려 쇠퇴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구려 쇠퇴의 이유로는 크게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 두가지를 뽑습니다.내부적 요인으로는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귀족들의 암투가 심하였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고구려 안원왕 시기에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분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내에서 내전 상태에 들어갔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부에서 왕권과 관련한 내부 암투가 심했고, 영양왕대에 이르러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영류왕 대에 이르러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몰아내고 연씨 정권을 세우면서 내부 왕권이 약해지게 됩니다.외부적 요인으로는 수많은 외세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는 돌궐과의 대립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이 돌궐을 몰아내면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를 견제한 수나라의 공세가 있었습니다. 수나라와의 전쟁도 을지문덕의 활약으로 크게 이기면서(살수대첩) 이로 인해 수는 멸망하게 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도 많은 국력 소비를 하게 됩니다. 수나라 이후 들어선 당나라와는 처음에 친선 노선을 선택하였으나, 위의 기술한 연개소문이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을 많이 소비하게 됩니다.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인 나당연합군의 공격과,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의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는 급속하게 몰락하게 되고, 이것이 멸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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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역사 삼국지의 화웅을 죽인건 손견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화웅의 죽음에 대한 삼국지 정사의 기록은 물어보신대로 손견에 의하여 전사한 것이 맞습니다. 양인성 전투에서 여포와 함께 양인성을 공격하였으나, 손견에게 도리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옵니다. 관우와의 전투는 연의적 각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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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있었던 오가작통법도 명나라에서 가져온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오가작통법이 처음 시작되었던 건 중국 진나라 시대였습니다. 진나라는 유명한 법치 국가였는데, 당시 유명한 법가 변법가인 상앙이 처음 시도한 제도였습니다. 목적은 서로를 쉽게 감시하기 위하여 5명씩 묶어서 연좌제로 다스리는 방식이었습니다.오가작통법은 우리나라 조선시대 외에도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자주 보였던 통치 방식이었습니다. 중국 제나라의 삼국비오제, 에도 일본시대의 고닌구미 등이 비슷한 통제 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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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이슬람 사람들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이길래 전쟁까지 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유럽과 이슬람 세력의 전쟁의 역사는 십자군 전쟁을 시작으로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당시 십자군 전쟁의 발발 원인은 "성역"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에게 신성한 지역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지역이기에 신성 시 여기는 성역이었고, 이슬람교에서는 최고 선지자인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예루살렘의 바위 성전에서 천국으로 올라갔다고 믿기에 신성하게 여기는 지역이었습니다.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이 점령하고 있었기에, 교황청의 주도 아래 기독교 국가들은 "성지 탈환"이라는 목적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총 9차례의 원정이 200년 넘게 진행되었으며, 초반 십자군은 기독교 국가 건립이라는 목표를 잘 따라 갔으나 뒤로 갈수록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변경되면서 본질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이슬람교 입장에서도 본인들의 성지를 갑작스럽게 침공당해 뺏기게 되었기에, 유럽vs이슬람(기독교vs이슬람교)의 대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현대 사회에서도 서양 세력과 이슬람 세력은 계속 대립 중에 있는데, 가장 큰 이유도 어떻게 보면 예루살렘이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예루살렘은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대전 종료 후 갑작스럽게 "유대인의 나라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미국 주도하에 예루샬렘에 이스라엘이 건국됩니다. 그 이유도 "예루샬렘이 유대인들의 시작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땅이다"라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팔레스타인은 쫒겨나게 된거죠. 이때 군사 무력 충돌로 많은 이슬람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슬람 세력에 테러리스트 단체들이 굉장히 많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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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가는 역사서에 전해지는 내용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황조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나온 기록들이 많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작서한 역사서로, 황조가에 대한 내용은 이전부터 내려오던 설화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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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패트릭이라는 분의 사망의 날이라고 하는데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입니다.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인물로써, 아일랜드 나라 자체에서는 국가적인 위인 중 한명입니다. 비영어권 나라에서는 알려지지 않긴 하였지만,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 많이 살기에 영어권 국가들 안에서는 퍼레이드도 하고 기념행사도 많이 진행합니다.성 패트릭이 유명한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던 것 처럼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인물이기 때문인데, 아일랜드의 국교인 기독교를 처음 들여왔기에 상당히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중심 교리 중 하나인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세잎클로버를 가지고서 알기 쉽게 전파한 걸로 유명하여 성 패트릭의 상징이 세잎클로버와 녹색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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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때 지역의 중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백제는 전성기 기준으로 한강유역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충청도~전라도까지 이어진 영토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한반도의 서남쪽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뺏기며 충청도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지는 충청도에 대부분 몰려 있었습니다.백제의 수도는 위례성(현재의 한강 한강) 이후에는 웅진(현재의 공주) -> 사비(현재의 부여)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청도 위주로 발전을 많이 하였고, 대부분의 유적들도 충청도인 공주와 부여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외에는 전라도의 익산에 백제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백제 무왕 시절 제2의 수도로 익산을 생각하여 익산에 궁전과 절 등을 건설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백제 문화지구도 공주-부여-익산 3개 도시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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