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님은 어느 해전에서 돌아가셨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이순신 장군님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습니다.노량해전은 정유재란때인 1598년 11월에 있던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님과 진린 장군이 이끄는 조명연합군과 전쟁에서 패배하여 후퇴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였습니다.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에서 수군으로 가장 유명한 가문인 시마즈 가문의 수장이었으며, 고니시 유키나카의 군대를 구출하기 위해 온 시마즈의 함대를 관음포에서 포위하여 괴멸시켰던 전투였습니다.이순신 장군님의 전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전선 앞에서 직접 활을 쏘며 전두지휘하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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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이탈리아는 왜 독일과 편을 먹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제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전,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에 의한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기반으로 힘을 키워 39세에 이탈리아 총리로 취임하였으며, 독일과 힘을 합치게 된 시점은 에티오피아 침공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과거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슬로건으로 아프리카 침공을 계획중에 있었고, 당시에 힘을 키우고 있던 나치 독일의 확장을 보면서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프랑스보다 독일과 밀착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탈리아가 독일과 같이 추축국의 중심까지 될 생각은 없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독일의 폴란드-프랑스 침공을 보고 실제로 프랑스를 점령하는 모습을 보면서 승기를 잡은 독일에 합류하여 추축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추축국 참전은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무솔리니의 행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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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재미있나요? 볼까 말까 하는데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왕과 사는 남자는 계유정난 이후 단종의 유배 생활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계유정난은 단종의 삼촌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던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좌를 탈취하려한 사건으로, 당시 실권자였던 김종서를 축출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단종을 압박하여 왕권을 양위받아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후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를 하게 되면서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등,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왕과 사는 남자는 이 유배에 대한 이야기로 등장 인물들의 이름을 잘 보시면서 영화를 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추가로 한국사를 공부한지 오래되어도 볼만한 영화입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 몰입하여 보기 좋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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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도를 보면 북쪽을 위로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북쪽을 지도의 위로 한 이유는 나침반의 사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지도를 읽을 때 위를 북쪽으로 두는 이유는, 나침반과 같이 사용 시 나침반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지도를 보고 읽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침반과 지도의 방향을 일치시켜야, 실제로 길을 찾을때 동/서쪽(우측과 좌측)을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침반 이전에는 바다에서 북극성을 기준으로 길을 많이 찾았기에, 북쪽을 위쪽으로 바라보고 지도를 보는게 보편화되어 지도의 위쪽 = 북쪽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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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능력검정 시험 인강 추천이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인강으로 가장 많이 듣는건 큰별쌤 최태성 선생님 강의를 많이 듣습니다. 책만 사면 강의는 무료로 들을수도 있기 때문에 주변에 추천도 많이 하고 있고, 한국사에 대해서 쉬우면서도 포인트를 잘 잡아서 알려주시기 때문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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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몽골에서 유래되었다고 들었는데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문의주신 것과 같이 소주는 몽고의 고려 침공 시기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주의 주조 방식은 증류수로 시작은 페르시아에서 연금술사들이 불로장생의 약을 연구하다 알콜을 증류하는 법을 알아내었고, 이것이 리큐르나 소주와 같은 술로 발전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증류 방식의 술이 몽골의 침략 시대때 들어왔다고 합니다.한국의 전통주로는 막걸리, 청주, 약주 등의 양조주였습니다. 증류수와는 다른 제조 방식으로 주로 곡물을 누룩으로 발효시켜 제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먹걸리에 대한 정확한 기원은 기록된 바가 없으나, 고조선 시대 [공무도허가]에도 술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시대부터 존재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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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무당은 조상이든 신이든 뭔가 알려주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비과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진짜인지 아닌지는 증명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무당의 기원은 고조선 이전부터 있던 제사장부터 현재까지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때도 중국의 도사나 일본의 음양사, 아시아 문화권의 샤먼이나 서양문화권의 퇴마사, 마녀 등 신이나 귀신과 관련된 토속 직업은 계속해서 존재해왔습니다.개인적으로는 단순 인간의 공포심이나 미래에 대한 궁금증으로 속임수를 행하며 지금까지 위의 직업들이 이어져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무당의 경우 귀신에 대해 정리한 학문도 있는것으로 보아 마냥 속임수라고만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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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전날 왜 밥을 많이먹는 풍습이 생겼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정월 대보름은 우리의 민속 명절로, 기원도 우리나라의 역사에 기원이 있습니다. 신라시대 소지 마립간의 목숨을 구한 까마귀를 기리기 위한 풍습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래서 오기일(까마기를 기리는 날)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설날 이전에 우리나라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였기 때문에 1년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여러가지 풍습이 있습니다. 문의주신 밥을 여러번 먹는 다는 것은 사실 오곡밥, 찰밥, 부럼, 나물 등을 꼭 먹어야 1년의 복이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주 먹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의 풍습으로는 자주 먹을 필요는 없고, 위의 것들을 꼭 챙겨 먹는게 풍습이었습니다.이외에도 귀밝이술이라 하여 찬술을 먹는 것, 액운을 내쫒기 위해 짚을 태우는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등을 해야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조선시대로 들어오며 중국 절기를 많이 따르다보니 설날의 의미가 더 크게 되었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월 대보름의 영향력은 좀 더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는 이러한 풍습만 남아있고 지키는 사람들도 일부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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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쓰는 년도는 예수의 탄생기준이라는데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BC/AD는 기원전, 기원후로 BC는 Before Christ(주님 이전, 기원전)로 영어, AD는 Anno Domini(주님의 해, 기원후)라는 라틴어 입니다. 이와 같은 기원전, 기원후가 처음 쓰인 것은 것은 525년 로마의 수도원장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처음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시대 이후 유럽의 기독교 중심적인 중세시대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지금보다 더욱 강했습니다. 이로 인해 위와 같은 표현이 주류 표현이 되었고 고착화 되었습니다. 중세 이후의 시대에서도 이미 고착화된 BC/AD 표기를 굳이 고칠 필요가 없었기에 서구권에서는 위 표현이 현재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시에 위 표현이 전 세계적으로 계속 쓰이는 이유는 서구 중심의 문화가 세계에 퍼져있는 주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종교적인 이유를 지금까지 믿어서라기 보단, 주류가된 서구 문화권의 표현이 지금까지도 고착회되어 지금도 쓰이고 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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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 후, 철처하게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엄흥도는 자신의 가문 선산인 동을지산에 단종의 묘를 만들고, 자신과 아들들은 모두 흩어져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자식들을 흩어져서 피신시킨 이유는 혹시라도 한쪽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더라도, 다른 아들들이 대를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여집니다.은둔지에 대한 기록은 전승으로만 내려오고 있으며 영월, 문경, 군위, 울산, 함경도 등 다양하며, 어디가 진짜인지는 아직까지 확실히 남아있진 않습니다. 다만 영월 엄씨의 집성촌이 위 부분에서 발견되는 걸로 보아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엄흥도에 대한 명예 회복은 엄흥도 사우 조선 후기부터 이루어졌으며, 사림의 거두였던 송시열의 건의로 엄흥도의 자손이 등용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고종대에 충의공으로 추대되어 공조판서의 관직이 추증되어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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