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사는 지금을 무슨시기라고 부르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지금을 부르는 명칭은 현대시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공룡이 있던 중생대(트라이아스기-백악기)까지는 연구에 의하여 연구자들이 붙힌 명칭입니다. 즉 사람이 나중에 명명한 시대이기에, 지금을 부르는 명칭은 현대 시대로만 부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당시의 연구자들이 "2026년은 00시대이다" 라고 명명해줘야 어떤 시기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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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가 한국어랑 유사한 단어들이 많은데 같은 한자권이어서 그런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일본어와 한국어는 서로 멀지 않기에 비슷한 단어가 많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백제와 당시 왜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기에,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꽤나 오랜 기간 교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고대부터 이어져 온 교류로 인하여 사용하는 단어에서도 유사성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를 진행 중에 있으나, 학계에서는 다른 어족의 별도 언어로 보고 있습니다.사용 문자는 한자를 기반으로 사용하였기에, 한자 단어는 당연히 한자 득음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사용하여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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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의 기원은 어디이며 언제부터 사용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도장이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통에 부조를 음각으로 새기고, 그대로 굴려서 개인용으로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기록은 부여 시대 왕의 옥새로 "예왕지인"이라는 도장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도장은 보통 왕이나 국가 관청의 직인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점차 귀족의 직인이나 거래의 확인 직인 등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개인을 대신할 수 있는 현재의 도장 형태로 변형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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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시대의 문화재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현재 경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문화재가 통일 신라 시대의 문화재 입니다.황룡사 - 현재는 복원중에 있는 대형 사찰 터 입니다. 40,000여개가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본 뜬 건축물들이 경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동궁과 월지 - 통일 신라 궁궐 유적 중 하나로, 문무왕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의 별궁이었으며 호수를 만들어 후원과 같은 기능을 하였습니다.석굴암 - 불국사와 같이 대표적으로 알려진 통일신라 건축물입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도 불국사와 함께 등록되어 있습니다. 신라시기에 수많은 석굴들이 지어졌는데,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석굴 사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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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타지마할 이라는건축물이 있는데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타지마할은 옛 인도의 제국 중 하나였던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과 그 황후인 뭄타즈 마할의 묘입니다.당시 무굴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시기였으며, 샤 자한은 엄청난 애처가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인 황후 뭄타즈 마할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 상실감을 묘역을 짓는 것으로 달래었다고 합니다. 타지마할은 완공까지 22년이 걸렸고, 페르시아부터 유럽까지 다양한 기술자와 장인들이 초청되어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였던 무굴제국의 재정이 파탄 직전까지 갈 정도로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었고, 완공 후 5년 뒤 샤 자한은 무리한 공사로 인한 시민들의 불만+재정파탄+아내의 사후 정사를 돌보지 않는 등 암군의 모습으로 인하여 아들이 강제로 폐위시켜 쫒겨나게 됩니다.원래는 타지마할은 아내를 위한 묘로 제작이 되었으나, 이후 샤 자한이 죽고 아내 뭄타즈 마할과 같이 타지마할에 뭍히게 됩니다. 그래서 타지마할에 가보면 석관이 있는 방은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지 않은데, 원래는 아내만 두려고 한 방에 샤 자한도 들어가게 되면서 그렇게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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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실시 이후에 등장한 공인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대동법은 세금을 쌀 또는 동전으로 걷는 법안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왕실 운영 등 국가 재정에 물품을 따로 구매를 해야 하였습니다. 공인은 정부에서 공인한 상인으로 공물 주인을 줄인 말입니다. 이들은 대동미라는 쌀을 받고 정부 관서에 물자를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종의 특혜를 누리는 상인이었기 때문에, 상업적 이윤을 많이 얻게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공인을 할 수 있는 공인권이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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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미국을 능가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건 단기간에는 아직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국이 어떻게보면 마음대로 국제 정세를 휘어잡고 있는 상황에서도 어느 나라도 미국에 반기를 들지는 못합니다. 이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 보았을 때, 그리고 기술력으로 보았을 때도 미국이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미국이 망하면 세계가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을려면 아직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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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온 양반 때문에 그 마을이 더 잘살게 되는 경우가 실제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유배에 대하여는 상당히 많은 케이스가 있고, 이 케이스들은 극과 극인 경우가 많습니다. 문의주신 것 처럼 유배를 온 양반으로 인해 마을이 흥하거나 글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는 경우는 고관대작이나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 유배를 당할때에 종종 보이는 양상입니다. 원래 유배를 당하면 가택연금 수준으로 집 밖으로 아예 나오지 못하고, 자급자족이 아니면 음식도 구하기 힘든게 유배의 규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정계로 다시 돌아갈 확률이 높은 관리들은 지방의 관리들이 편의를 봐주어 편하게 다니기도 하고, 음식도 구해다 주거나 일가친척들이 보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례로 무오사화로 인해 유배를 온 김굉필이 훈장을 하며 가르친 제자 중 한명이 조광조였습니다. 또한 제주도에 유배를 온 인물 중에 송시열이나 김정희 같은 자들도 있어, 당시 제주도에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반대로 역모로 인하여 유배를 온 자나, 다시 조정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잡범들은 유배지에서 굶어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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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음식 배달문화의 시초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배달문화는 조선시대에도 존재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배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시대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라는 책에 적혀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과거 시험을 본 다음날 일행과 함께 점심에 냉면을 시켜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에 적혀있는걸로 보아서는 이전부터 배달이 성행했다고 예측할 수 있으며, 이 기록 자체가 1768년의 기록이기에 그 전부터 배달이 있었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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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기록에 대해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조선왕조실록에서 철종실록 이후를 따로 취급하는 이유는, 조선 왕실의 정통적인 방식으로 실록청을 통해 작성된 실록이 철종실록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실록의 작성은 보통 승정원의 기록을 바탕으로 왕의 사후 작성하게 되는데, 철종 이후 고종부터는 일제에 의하여 바로 실록청이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관청인 "이왕직"에서 작성한 기록이기에, 일본의 관점에서 씌여졌다는 점에서 별도의 기록으로 보고 있습니다.실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번역하고 제공하고 있긴 하나, 다른 조선왕조실록과는 별도로 구분하여 취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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