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숭고한 이념이 결국 공포 정치로 변질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국민의회에서 제정된 1791년 헌법에의해 새롭게 입법의회에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온건한 개혁을 시도해하여 상퀼로트에게 불만이 되었으며, 결국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1792년 급진적인 국민공회가 수립되었습니다. 특히 자코뱅 당은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는데, 이에 불안을 느낀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대프동맹군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게다가 내부에서는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권력을 잡은 급진 자코뱅 세력은 혁명 정부의 위기라고 인식하여 공안위원회와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 혁명 세력을 처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결국 혁명의 적이라는 개념이 넓어지면서 자신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공포 정치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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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은 어떤 업적이 있는지요?
의친왕은 고종의 아들 이강이며, 순종의 동생으로 대한제국 황족 가운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관여한 인물입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여 서구 정치, 사회 문물을 경험했ㅇ며, 귀국 후 대한제국 육군부장과 대한적십자 총재 등을 지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려고 망명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황실의 일원이면서도 일본의 식민 지배에 끝까지 순응하지 않고 독립 운동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독립군을 지휘하거나 망명지에서도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상하이 망명 시도, 지원 등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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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사건이라는 건 어떤 내용인가요?
소록도 사건은 하나의 사건은 아니며, 소록도에서 일어난 한센인들이 겪은 인권 유린 관련 사건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소록도에서는 1917년 이후 한센인들이 강제 수용되었는데, 수용된 사람들은 강금, 강제 노역, 폭행, 신사참배 강요, 가족과의 격리 등을 겪었습니다. 또한 출산을 막기 위해 강제 정관수술, 임신 중절 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해방 직후인 1945년 일본인 직원들이 철수하면서 원생 대표 84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강제 수술과 차별은 계속되었는데, 1960년대 오마도 간척사업에 한센인들이 노동력을 제공하고도 토지를 빼앗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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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이 동서양 교류라는 측면에서 인류사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일까요?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한 거대제국이며, 팍스몽골리카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몽골제국은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역참제도를 정비하여 동아시아, 이슬람 세계, 유럽 사이의 사람, 물자, 기술과 지식의 이동을 확발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몽골 제국 당시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이 동서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인쇄술, 화약, 나침반, 이슬람의 천문학, 수학 등이 서로 교류되었으며, 유럽인의 동방 인식이 넓어져 이후 대항해 시대가 열리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즉, 몽골제국의 유산은 광대한 영토를 바탕과 역참 등을 통해 활발한 동서 교류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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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다원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엄격한 유교 사회로 획일화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은 고려말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입니다.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개혁 사상으로 하여 고려말의 정치 혼란과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불교 타락 등을 해결하고,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수립하려 한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에 따라서 왕권과 관료제, 양반 중심 신분제, 가부장적 가족제도, 유교식 제례와 교육을 정비했습니다. 태종의 사병 혁파와 중앙집권 강화도 이러한 통일된 국가 질서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고려도 완전히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는 아니었으며, 조선도 처음부터 모두 성리학적 유교 윤리 규범에 따른 획일적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선 전기부터 수백 년에 걸쳐 불교·토속신앙·고려의 가족 관습이 점차 유교식 질서로 바뀌었고, 특히 17세기 이후 그 변화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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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멸망에 실제로 납이 기여했나요?
로마 제국의 멸망은 여러 요인이 영향을 미친 결과입니다. 서로마 제국은 황제와 군대의 반복되는 권력 투쟁, 과도한 군사비와 재정 악화, 화폐 가치 하락과 물가상승, 세금 부담과 농민층의 붕괴, 게르만족의 침입, 전염병의 확산, 가뭄 등입니다. 로마인들은 납을 수도관, 조리·식기류, 화장품 등에 사용했습니다. 특히 포도즙을 졸여 만든 납 아세트산염 계열의 감미료를 음식과 와인에 넣었다는 기록이 있어, 일부 상류층은 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납은 로마인들이 수도관과 와인 감미료 등에 사용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의 건강을 해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납은 사회 구성원의 건강과 출산율, 특히 일부 상류층의 건강에 악영향을 준 요인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납중독이 비록 로마 멸망의 유일한 요인은 아니지만 로마 말기의 여러 부정적 요소를 악화시키는 보조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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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사전에 등록된 친일파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민족문제연구소에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첫째 일제의 국권 피탈 과정에서 협력한 매국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을사늑약, 정미7조약, 한일합방 등 일제의 침략에 동조, 협조한 매국노입니다. 즉, 1905년 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과 같은 을사오적은 대표젹인 친일 매국노입니다. 두번째로는 35년동안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한 고위 관료, 군인, 경찰 등입니다. 예를 들어 중추원 고문, 참의, 고위 경찰 판검사 등이 있습니다. 또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자들입니다. 일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을 확대했는데, 이에 대해 조선인들이 지원병, 징용 등에 나갈수 있도록 선전 선동한 학자, 교육자, 예술가, 기업인, 언론인 등입니다.언급한 안상호는 이완용 치료, 대정친목회 평의원 등을 했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더라도 그가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그의 활동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아 인명사전에 올리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정도에 따라 증보판에 포함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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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공부 재미있네요..그런데 왜이리 우리 역사중에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은지..
질문자의 생각에 많이 공감합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지만 조금만 달랐으면 역사의 큰 변화가 있었을 장면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발해와 신라가 함께 발전했다면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정치, 문화적 공간이 더 오래 유지되거나 현재에 이르지 않았을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실학 사상을 정책에 반영하여 상공업과 신분제 개혁을 더 일찍 추진했다는 근대화의 충격을 더 잘견뎠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근대화에 더 적극적이었다면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내고 자주독립 국가로 발전하지 않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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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후손들은 모두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친일매국노의 자손들은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에 비해 부유한 생활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일부 친일 인사와 후손들은 친일의 대가로 축적한 재산과 능력을 바탕으로 토지, 재산, 교육,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사용하거나 망명 생활로 소진하고, 해방 후에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친일파의 후손들의 그들의 조상들의 재력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은 아니지만 기득권을 이용한 경제적, 정치적, 교육적 환경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그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친일반민족해위자가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위로 축적한 재산을 환수하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어도 환수 실적이 미진한 것이 안타까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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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에는 왜 왕위 쟁탈전이 그렇게 자주 일어났나요?
무열왕의 즉위와 삼국 통일 전쟁으로 무열계 직계가 집권하면서 전제 왕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혜공왕 이후 무열계 왕위가 무너지면서 왕위 계승권을 놓고 여러 진골 귀족들이 왕위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신라 상대에는 성골 귀족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진골 귀족 출신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 계승 대상자가 넓어졌습니다. 하지만 중대에는 무열계의 강력한 왕권으로 인해 내물계의 다른 가문들은 계승권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점차 왕권이 약화되고 혜공왕 이후 무열계의 왕위 계승권이 무너지면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던 내물계의 많은 진골 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쟁탈전을 벌인 것입니다. 또한 골품제의 폐쇄성으로 정치 참여가 제한되고, 농민 몰락과 지방 세력의 성장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도 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왕위가 안정적으로 세습되지 못하고 귀족들의 반란과 왕위 교체가 반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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