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은 왜 반원 개혁정책을 추진했나요?
공민왕은 1351년 원나라의 부마로서 국왕을 즉위했지만 오히려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원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 친원세력에 의해 왕권 유지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려는 원의 간섭으로 영토상실 등 자주성이 매우 훼손된 상태였습니다.이와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공민왕은 원나라의 내정 간섭 기관으로 전락한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하고, 기철 등 친원파를 제거했습니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겨하여 회복하고 원나라 연호를 폐지와 관제를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몽골풍을 일소하고, 왕실의 호칭도 복구했습니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과 더불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정책으로 정방을 폐지하고, 과거제를 강화하여 신진사대부를 우대했으며, 신돈을 중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 운용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책은 권문세족의 반발과 노국공주의 사망 이후 약화되었으며, 결국 피살되면서 중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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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를 보면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을 나누지만 사실 둘은 같은성격의 집단 아닌가요?
고려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를 혈족 집단으로 본다면 같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닙니다. 권문세족은 원나라 간섭시기 원나라를 배경으로 성장한 지배 세력입니다. 이들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토지를 소유한 기득권입니다. 하지만 신진사대부는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따라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세력입니다. 이들은 지방 향리, 지주 출신이 많으며,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권문세족의 폐단을 비판했습니다. 일부 신진사대부들 가운데 권문세족 출신도 있지만 정치적 성향과 시대적 역할을 달리했기 때문에 다르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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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얼음은 궁궐로 어떻게 안녹게 옮겼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조선시대에도 한양의 석빙고가 있어 얼음을 보관하여 여름에 사용했습니다. 우선 석빙고는 반지하 구조, 지붕을 흙과 잔디로 되어 태양 복사열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환기구로 더운 공기를 배출하고, 바닥에 경사진 배수로를 파 녹은 물이 바로 빠져 나가고 얼음 사이에 짚을 채워 단열 효과를 높였습니다.그리고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석빙고에 보관했다가 궁궐이나 양반집으로 옮기는 것은 우선 목재 수레를 이용하여 옮겼는데, 큰 나무 상자에 얼음을 담고, 왕겨나 짚으로 단열 처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백명이 동원되어 빠르게 동원했습니다. 경국대전의 기록에 의하면 얼음 공급 규정이 매우 엄격하게 규정될 만큼 얼음의 분배는 매우 중요한 국가행사였습니다. 그리고 빙표를 종친, 대신, 각 관아에 하사해 빙고에 가져가면 해당하는 만큼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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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삭제권'이 생긴다면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요?
디지털 시대에 삭제권은 이미 존재하는 권리입니다. '유럽 일반개인정보보호법' 17조 삭제권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에 관한 개인정보 삭제를 요청할 수 있으며, 기업은 특정 조건에서 이를 이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삭제권은 절대적 권리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충돌될 때, 공익을 위한 정보, 법적 의무는 제한됩니다.우리나라도 2020년 개인정보법으로 '잊힐 권리'가 도입되어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특정 조건에서만 삭제 요청이 가능합니다.이를 통해 판단하면, 개인의 재기권과 사회의 알권리를 균형있게 조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사생활 침해, 정정된 과오, 동의 없는 정보는 삭제권으로 허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익 관련 범죄, 역사적 기록, 타인의 권리 침해 등을 제한되어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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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왕은 왜 정복전쟁 이후 불교로 전향했나요?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고대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칼리가 전쟁 승리 등을 통해 영토를 광대하게 점령하여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을 통해 10만명 이상의 전사자, 15만명의 포로 등 수 많은 희생도 초래했습니다. 전쟁이 끝난다음 아소카느 피로 물든 전장을 둘러보며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소카왕의 전쟁에 대한 참회를 암석에 새겨 칙령으로 남길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정복을 하지 않고 다르마(법)에 의한 승리를 추구를 시사하며 불교로 귀의했습니다. 따라서 아소카왕은 불경을 간행하고, 전국 곳곳에 84000개의 스투파를 세우고 승려들을 제국에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복지와 종교적 관용, 법치주의에 입각한 통치를 시행했습니다.즉, 아소카왕은 전쟁의 참상을 참회하고, 불법에 의한 평화주의 통치로 전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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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서 실제로 3족을 처벌한 경우는 없었죠?
삼족의 범위는 좁게는 아버지, 어머지, 아내이며, 넓은 의미로는 아버지계, 어머니계, 아내계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넓은 의미의 삼족(부계+모계+처계)를 처벌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조선시대에 대역죄를 범한자는 연좌제를 적용해 본인, 아버지, 16세 이상 아들는 사형, 그리고 15세 이하 아들, 어머니, 아내, 딸, 손자, 형제, 자매는 노비로 삼고, 백부와 숙부는 유배를 보냅니다. 이외 같은 대역죄도 부계 중심의 3대만 처벌합니다.우리나라가 이와 같이 삼족을 멸하지 않는 이유는 혼인 관계로 얽혀 있어 잘못하면 자신들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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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오답노트 작성방법을 알려주세요.
한능검의 오답노트 작성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틀린 문제 전부를 적는 것보다는 다시 볼 가치가 있는 문제만 압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미 이해한 문제는 과감하게 줄이고, 반복해서 헷갈리는 개념만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시대를 혼동한 문제, 비슷한 인물, 맞추는데 오래 걸린 문제 등을 선택하여 정리하도록 합니다.정리 요령은 검정색 볼펜으로 적고, 시험에 나올 문제는 파랑색, 그리고 새로 알게된 것은 빨강색 볼펜으로 추가하면 한눈에 파악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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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우리나라 이름에 대해서 질문드립니다.
조선 시대에는 왕의 이름은 둘 글자로 쓰지 않고 한글자(외자)로 스는 것이 많았는데, 이는 '피휘'를 위한 것입니다. 즉 왕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게다가 왕의 이름은 상용하지 않는 특이한 글자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왕이 되기 전 일반 왕족으로 일반인으로서 이름인 '명복'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즉위하기 이전부터 사가에서 '명복'이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즉위한 이후에는 피휘를 위해 외자 이름인 '이형'으로 개명했습니다.고종과 같은 사례로는 철종은 본명이 이원범이었는데, 즉위 후 '이변'으로 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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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왜 스스로 황제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티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에 승리하여 사실상 로마의 유일한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직을 받아들이며 공화정 폐지라는 의심을 사 암살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죽음을 통해 공화정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점차 권력을 집중하려 했던 것입니다.비록 원로원에서는 존엄한 자라는 '아우구스투스'라 칭하였지만 자신은 스스로 로마 제1의 시민이라는 '프린캡스'라는 칭하면서 겸손한 위치를 강조한 것입니다.즉,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외관을 유지하면서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는 '교묘한 위장'을 통해, 로마의 첫 황제로서 안정적으로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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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호잠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저냉을 전개한 의병총사령관입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남도 담양에서 5천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왜군을 격퇴하였습니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의 침입을 막아 전라도 진입을 막는데 공을 세웠습니다.하지만 그의 이와 같은 전공에 선조와 조정의 질투를 받아 30세의 나이로 역적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장살 당한 비운의 영웅입니다. 하지만 승전을 거듭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자 선조는 '왕과같다'는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질투하였습니다. 또한 충청병사 이시언, 경상병사 김응서 등의 그의 공을 시기하여 죽이려 했으며, 영의정 류성룡도 그를 반역자로 체포하기 까지 했습니다. 결국 1596년 이몽학의 난과 억지 연계되어 역적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해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살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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