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질 윤, 깃들일 서 이름 한자 뜻 풀이 부탁드립니다
빠질 윤(淪)의 기본 의미는 '빠지다', 또는 '떨어지다'입니다. 하지만 이름으로 사용할 때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몰두하다', '몰입' 등의 의미를 담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깃들일 서(棲)의 의미는 '새가 나무에 깃들다', '누군가 머무르다', '정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으로 해석하면 안정, 평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즉, '윤서'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깊이 빠져 살다', '깊이 몰입하여 살아가다'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깊이 몰두해 한 곳에 깃들처럼 지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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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공무원이란 어떻게 성장하여왔는가
경찰 공무원은 1945년 광복 이후 경무부가 되면서 각 도, 시에 경찰관서가 설치되고, 한국인 경찰공무원이 본격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1948년 정부 수립부터 1974년까지 내무부 산하 치안국이 중앙 경찰을 맡게 되었습니다. 1974년 유신 체제에서 치안본부가 권력, 정치 감시 기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1991년 이후 경찰청이 독립하고, 2021년에는 경찰법 전부 개정과 자치 경찰제로 하여 국가 수사본부와 지방 자치 경찰로 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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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광증이 있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사도세자가 정신적 문제는 분명이 있었습니다. <영조실록>, <정조실록> 등에서 사도세자가 흥분, 분노로 내관, 궁인을 폭행 죽인 사례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미칠 듯이 속이 답답하고 미치겠습니다' 등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편지를 남긴것도 있습니다. 즉, 사도세자는 우울증, 조울증 등 전신 질환을 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에서 약간 과장된 것이 있다고 일부 학자들의 비판이 있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는 사도세자에 대한 문제가 커지자 '조정 안정과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해 왕세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봅니다. 영조는 폐세자로 강등한 뒤 임시격리에서 시작하였다가 사도세자가 통제 불능이라 판단하여 뒤주에 가둔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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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후궁이었던 조귀인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인조의 후궁인 조귀인은 병마절도사 조기의 서녀 출신으로 전열왕후를 모시던 궁녀였습니다. 그녀는 성품이 강하고, 영리하며 인조의 감정과 망설임을 잘 읽었습니다. 인조가 생애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궁, 효명옹주를 낳은 정치적 모체였습니다.하지만 그녀는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의 스파이, 왕조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끊임없이 모함하여 압박하였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소현세자의 죽음이 감염과 질병이라 하지만 동시에 누명, 저주, 독살 의혹의 중심에 조귀인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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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일반 백성들 간에 이혼이라는 개념이 없었나요?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존재했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 가운데 하나인 <대명률>에 따르면 철거지악, 의절 등을 이혼 규정으로 삼았습니다. 다만 양반가의 경우에는 국가 승인, 관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평민들은 훨씬 쉽게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백성 사이에 '사정파의'(부부가 서로 마주 앉아서 더 이상 못산다고 말하고 헤어지는 것), 그리고 '합의휴서'라는 단순 서술문으로만으로 이혼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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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독립 운동가 중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나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김구, 윤봉길, 안창호,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도 있지만 이름모를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있어 우리민족이 독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예를 들어 동풍신 열사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처럼 만세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었으며, 고문과 옥중 투쟁을 견뎌냈습니다. 아화림 지사도 여성 독립 운동가로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를 함께 추진하였습니다. 나석주는 의열단 단원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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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라비아 숫자는 본래 인도에서 발명된 숫자입니다. 아랍 상인들은 이를 편리하독 판단하여 널리 사용한 것이고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사용합니다. 특히 유럽 상인들이 아랍 상인들이 사용하는 숫자라고 하여 아라비아 숫자라고 한 것입니다.현재 아랍권에서는 서양식 아라비아 숫자도 쓰지만 새롭게 디자인된 동아라비아 숫자를 쓰기도 합니다. 즉, 아랍권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는다는 오해는 일부 동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하는 것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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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들은 추운 겨울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어떻게 업무를 봤나요?
경복궁의 근정전은 정전으로 격식용 건물입니다. 조하, 대례, 사신 접견과 같은 의례 행사에 주로 활용되는 장소입니다. 물론 근정전은 난방이 부족하여 겨울철의 활용은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입니다. 대신 근정전 옆의 사정전과 그 부속 건물인 천추전에는 난방이 가능하여 왕과 신하들이 실제로 일상 회의와 정책을 집행하는 장소로 운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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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물론 중일전쟁이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에게 미친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국민당군의 주력군은 일본군에 의해 잃거나 손상이 컸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의 공세에 국민당은 내륙 깊숙이 충칭으로 후퇴하였습니다. 반면 공산당군은 일본, 국민당과 거리가 있는 산악 지역에서 세력을 넓혔습니다. 하지만 공산당군은 최전선인 화북 지역에서 일본의 주력군과 맞서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국민당군만 약화되었다고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민당은 정치, 경제 부패로 인민들의 지지를 상실했습니다. 또한 전략적으로 도시, 철도 중심의 점선 전략은 공산당의 면, 지역 전에 밀렸습니다. 즉, 중일전쟁으로 국민당군의 세력 약화도 있지만 국민당 스스로 문제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공산당의 조직력에 밀려 패배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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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는 명을 어기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루어주었는데 세조는 끝까지 그 사실을 몰랐나요?
몰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라고 엄명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엄흥도는 이를 어기고 몰래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찾아 암장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 세조가 알았으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드러난 시점은 중종, 숙종 때 공식 기록적으로 등장합니다. 1517년 중종 때 단종 묘를 찾으라는 명을 내려 '노산군묘'로써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숙종 때 엄흥도의 충의와 후손 면역 문제까지 논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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