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은 넓은 영토에 명령을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전달했나요?
로마는 광대한 영토를 제국 곳곳까지 이어진 도로로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주요 도로망과 역참, 체계적인 전령 조직의 쿠르수스 푸블리쿠스를 정비, 운영하였습니다. 전국의 도로망은 8만km의 석조 도로로 건설하여 연결되었으며, 20~30km마다 역참을 설치하여 전령이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 전령은 하루 80~100km, 긴급 명령은 말만 갈아타면 160~200km까지 전달이 가능했습니다. 쿠르수스 푸블리쿠스는 국가 전용 조직으로 민간인들은 사용할 수 없엇으며, 공식 문저에는 봉인, 인장이 있어 위변조를 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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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수은은 왜 장수하는 것으로 인식 되엇나여?
고대 중국에서 수은은 장수, 건강과 연관되어 인식되었습니다. 진시황도 수은을 장기간 복용하여 50세의 나이에 수은중독으로 사망하였습니다.수은은 금속인데도 상온에서 액체이고, 변색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균과 방부 효과로 부패를 늦추는데, 이를 먹으면 산 사람에게도 불노장생약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또한 피부에 바르면 혈관을 수축하여 피부가 창백하고 팽팽해 젊어지는 효과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교 연금술사들은 자연의 원리를 이용하여 신선이 된다는 사상을 믿었는데, 수은은 금속인데 액체라는 신비한 물질로 추앙받아 불로장생의 단약 재료로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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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와 고려시대 서로 전투력 차이는 어느정도 차이가 났을지 궁금합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고려시대의 군사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수당과 대결하여 승리하였으며, 고려는 거란을 격퇴하고 몽골과 항쟁했습니다. 최대 병력은 고구려가 10만명 이상 추청되며, 고려는 10~30만명 정도 되었습니다.고구려의 장정은 중장기병과 기마 궁수 조합으로 야전에서 강력한 타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고려는 산성 방어 능력이 우수하고 더 많은 인구 기반으로 오래 버틸 수 있었습니다. 질적으로는 고구려군이 우세하나 양적으로는 고려군이 우세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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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군단병은 은퇴 후 어떤 혜택을 받았나요?
로마 군단병은 자익 복무 후 은퇴를 하면 토지, 퇴직금, 로마 시민권 등의 혜택이 제공되었습니다. 공화정 시기 군인 정치가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 군대를 상비군화하면서 장기간 복무한 병사들에게 식민지 토지를 10~50유게라 정도를 분배하는 정책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아에라리움 밀리타레'라는 군인 연금을 도입하여 토지 대신 현금 퇴직금을 표준화하였습니다. 또한 비로마인에 대해서는 25년 근무하면 로마 시미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그외에도 면세 및 사회적 특권을 부여하여 지역사회에서 우대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 군단병의 퇴직 복지 제도는 장기 복무와 충성심을 유도할 수 있었으며, 황제 개인에 대한 충성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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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는 왜 그렇게 거대한 규모로 건설됐나요?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왕국 시기 힌두교 우주론에 입각하여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중앙에는 힌두교에서 우주의 중심이라 여기는 수미산, 4개의 작은탑은 수미산을 둘러싼 산맥을 표현합니다. 크메르인들은 왕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과 합일한다고 여겨 자신의 사후 세계를 위해 거대한 사원을 건립한 것입니다.특히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수리야바르만 2세는 자신을 비슈누신의 화신으로 여겨 광대한 사원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크메르 제국 전성기의 경제력과 기술력이 반영되어 대규모 공사가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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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동전 중에 가치가있는거 나열좀 해주세요
현재 희귀 동전으로는 1966년 1원은 최초 발행 때문에 30만원에 거래되며, 1969년 1원은 적동 소재로 매우 희귀하여 70만원에 거래됩니다. 5원과 10원짜리도 1966년 최초 발행으로 각 85만, 100만원까지 거래된다고 합니다. 1970, 1998년도 10원짜리 동전도 희귀성때문에 비쌉니다.그리고 1972년 최초 50원은 30만원, 1998년 50원은 780만원에 거래됩니다. 100원짜리 동전으로는 1970년 최초 발행은 1000만원까지, 1981년 무광은 약 700만원에 거래됩니다. 500원짜리도 1982, 1987, 1998년에 발행된 동전이 비싸게 거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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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는 바나나가 역사적으로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알고 싶어요
우리나라에 바나나가 최초로 들어온 시기는 개항 이후입니다. 19세기말 ~ 20세기초 개항장과 일본, 대만을 경유 무역을 통해 바나나가 들어왔으나 궁중에 진상되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바나나는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원산으로 우리나라에는 재배되기 어렵고, 조선시대에는 수입 경로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다만 일본에서는 1569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바나나가 헌상된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바나나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사실상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항과 더불어이며, 대중화 시기는 1960년대 이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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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나 백제시대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나요?
신라와 백제 역사를 알 수 있는 당대 역사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신라는 진흥왕 6년(545)에 거칠부가 <국사>라는 역사를 서술했으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근초고왕 때 고흥에 의해 <서기>라는 역사를 기술했으나 역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일본서기 등에 인용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남아 있습니다.당시 기록이 없는 것은 전쟁과 국가 멸망으로 인한 기록 유실도 있지만 후대에 재편찬되면서 원본이 소실된 것도 이유입니다. 다만 고려시대에 기술한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 '고기'를 참고했다고 언급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고려시대까지는 삼국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금석문, 비문 목간 등의 유물을 통해 직접적으로 당시대를 일부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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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는 왜 환국이라는 정치적 급변동이 자주 일어났나요?
숙종 시기에는 환국이 빈번하게 일어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었습니다. 환국은 정국이 급격히 전환되어 집권 세력이 교체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속종 때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환국이 빈번했습니다. 이는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편당적 붕당을 운영하였기 때문입니다. 숙종은 의도적으로 붕당이 한쪽으로 기울면 다른 쪽을 끌어올려 견제하는 방식을 국왕 중심의 정국을 운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책은 보기 드문 적장자 출신의 왕이라는 자신감에서 표출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후계 문제와 궁중 갈등이 빚어진 사건입니다. 인현왕후가 후사가 없자 숙종은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붕당의 이해와 결부되면서 환국이 반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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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무당의 역사는 언제부터 였을까요?
무당은 원시종교인 샤머니즘에서 기원합니다. 신석기 시대이 원시 신앙으로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이 있었는데, 한국 무당의 역사도 여기부터 기원합니다. 특히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서 단군 왕검은 제사장과 군장의 제정 일치를 말하는 것으로 제사장은 곧 무당입니다. 또한 무속에서 사용하는 제의용 도구인 청동 방울, 청동 거울 등이 청동기 시대 유물로 출토되고 있으며,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가 오늘날 굿을 할 때 세우는 솟대, 당산나무의 원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무당이 많은데, 한국인들이 타인과의 비교, 복에 대한 집착, 불확실한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한 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특성과 개인의 문제를 샤머니즘에서 찾으려는 성향때문입니다. 또한 태몽, 귀신 등 초자연적인 존재에 한국인은 개방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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