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늘 탄탄대로 걸어온 완벽한 성공 이뤄낸 사람과,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지만 결국 일어나 자수성가한 사람 중, 리더로서 누구의 조언이 더 가치 있고 들을 만할까요?
단 한번도 실패없이 성공을 일군 사람보다 실패와 좌절을 겪고 일어난 리더의 조언이 값집니다. 일반적으로 항상 성공만 할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조언과 노하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공의 기쁨뿐 아니라 실패의 원인, 조직 붕괴, 회복 과정까지 직접 겪어봤기 때문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 에이브리햄 링컨이 있습니다. 여러번의 실패와 좌절을 겪고 결국 대통령이 된 인물입니다. 위기 수습·변화 대응·사람 관리는 실패를 겪어 본 리더의 조언이 더 실전적이고, 확장·정밀 운영·성과 재현은 성공을 오래 지켜 본 리더의 조언이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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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병은 무엇일까요?
인류에게 가장 많은 희생을 준 병은 말라리아입니다. 말라리아는 전세계적으로 누적 수십억명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현재도 가장 치명적인 질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말라리아 감염 사례는 2억명 이상이며, 그 가운데 사망자는 60만명 정도로 봅니다. 사망자의 95%는 아프라카 지역입니다. 지금도 매년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는 질병입니다. 그 다움으로는 천연두, 결핵, 스페인 독감,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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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바이킹은 9~11세기 스칸디나반도 출신 북게르만들의 이동과 관련된 세력을 말합니다. 이들은 배를 타고 유럽 각지로 이동하여 약탈, 교역, 탐험을 하여 유럽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이들이 11세기 갑자기 사라진 것은 바이킹들이 유럽인들처럼 유럽 곳곳에 정착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잉킹들은 노략질을 그만둔 뒤 주로 농사, 목축, 무역, 어업 등을 하며 살았으며 일부는 아에 국가를 건설하여 행정 체계 안에서 정착했던 것입니다. 즉, 바이킹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은 사실 사라진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정착하여 살면서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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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역사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에 의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간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전투로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 전투를 들 수 있습니다. 다부동은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낸 방어 전투입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뒤집어 서울을 수복하는 계기가 된 전투입니다. 또한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의 개입 이후 최대 전투입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고 10월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합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서울을 다시 빼앗겼지만 3월 재수복 이후 38선 근방에서 공방을 펼쳤습니다. 1951년 7월 소련의 제안으로 시작된 휴전 회담은 휴전선 문제와 포로 문제로 2년간 지체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6.25 전쟁으로 국군은 약 13만명, 유엔군은 3만 7천여명, 북한군은 32만명, 중공군은 14만 8천명 사망하였습니다. 또한 민간인 사망자도 24만 4천명 이상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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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양인들은 그들의 문화의 뿌리가 그리스라고 하나요?
서양 유럽에서는 그리스 문화를 문화의 뿌리로 여깁니다. 서양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정치, 가치, 철학 등을 그리스에서 체계하였으며, 이를 로마가 계승하였습니다. 로마 문화는 중세 유럽 문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 서구 문화로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문화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같은 주변 동방 문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서양인들이 스스로 설명할 때 상징적으로 내세운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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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법전은 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을 담았나요?
함무라비 법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동해보복의 원칙입니다. 당시에는 씨족, 부족 단위 사회였기 때문에 법으로 규정한 것보다 보복의 한도가 넘어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법으로 과잉 보복을 막고 처벌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즉, 보복의 한도를 정해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입니다.하지만 동해보복이라고 하지만 신분제 사회의 불평등한 질서를 반영했습니다. 즉 신분에 따라 처벌과 배상의 정도가 달라졌으며, 그 만큼 강한 자의 폭력을 제어하는 기능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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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미국 보고서에 "독도는 한국 땅" 명시가 확인됐는데, 이런 증거 외교에 어떻게 써야 할까요?
1948년 미군 기밀 문서의 핵심은 독도가 한국의 일부로 이미 분명히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보고서는 1948년 6월 8일 미 공군의 오폭 사건을 조사하면서 독도가 일본의 섬으로 오인된 채 훈련이 진행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단순히 지리 메모가 아니라 미군 내부가 당시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현장 인식이 따라 가지 못해 일어난 사고라는 것입니다.이 문서 이전인 1946년 SCAPIN 677 지령과 1951년 관련 서신 처럼 흐름을 연결하는 문서로 미국의 일관된 독도에 대한 일관된 한국령 인식 논리입니다.이 문서는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보강하지만, 단독으로 모든 분쟁을 끝내는 결정타는 아닙니다. 다만 “해방 직후 미국조차 독도를 한국 영토로 봤다”는 점을 보여줘, 외교·연구·홍보에서 상당히 유용한 카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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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어떻게 말로만 거란의 침입을 막고 강동 6주까지 얻었나요?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거란이 고려가 신라 계승한 나라라고 하였으나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반빅하였습니다. 또한 여진이 거란과 통교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어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주면 고려가 거란과 통교할 수 있다고 주장였습니다.당시 거란(요)는 고려와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고려의 친송 정책을 막고 송과 대결에서 후방의 안정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서희의 담판에 의해 거란은 침략을 중단하고 철수하였으며, 이 덕분에 고려는 강동6주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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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화권에서는 왜 '한' 보다 '조선'을 더 많이 사용하나요
중국과 일본에서는 과거 한반도를 오랫동안 조선반도로 불러왔습니다. 이는 과거 조선 국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이후 한국, 대한 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는 자연스럽게 한반도, 한국어, 한민족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조선'이라는 국호 사용으로 두체제 병립으로 조선족 표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이런 호칭의 시정을 중국, 일본에 요구하기도 했지만 국가간 습관이라 쉽게 바뀌지 않는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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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한글 현판 함께 걸지 국민 토론, 문화유산 원형 보존이 먼저일까요?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함께 걸어 한글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의견입니다. 하지만 문화유산은 있는 그대로 보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다만 그 기존 현판을 바꾸지 않고, 안내문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봅니다. 즉, 문화 유산은 현재의 취향보다 당시의 모습과 고증이 우선입니다. 광화문 복원은 오랫동안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부로 진행되어 왔으며, 현판 변경은 복원 원칙을 흔들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원형은 지키면서 한글로된 안내문 형식으로 보완하는 것이 옳은 선택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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