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냉전 시대를 촉발한 쿠바 미사일 위기의 전말이 뭔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1962년에 일어난 쿠바 위기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 일어난 대표적 충돌 위기였습니다. 미국은 1961년 터키와 이탈리아에 소련 모스크바를 10~16분안에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해 소련을 압박했습니다. 이에 1961년 쿠바는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 실패 이후 미국의 재침공을 우려해 소련에 의존하였으며, 흐루쇼츠는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여 미국의 침공을 억제하고 전략적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1962년 7월 흐루쇼프와 카스트로는 비밀리에 합의하여 8월부터 미사일과 핵탄투를 쿠바로 이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10월 쿠바 주변 해역을 해상 봉쇄를 단행했습니다. 소련 선박들이 봉쇄선에 접근했다가 멈추거나 회항하면서 충돌을 피했지만 해상과 공중에서 양측 군대가 극도로 긴장한 상태가 13일간 지속되었습니다. 10월 26일 흐루쇼프가 캐네디에게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쿠바의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제안을 하였으며, 미국측의 양보하는 구조로 10월 28일 소련이 미사일 철수를 발표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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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족 무덤이나 묘가 도굴에 많이 이용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황족 무덤이 도굴의 주요 대상이 된 것은 막대한 부장품 때문입니다. 왕과 귀족은 생전과 같은 생활을 누린다고 믿어 금은보화, 비단, 금속, 도자기 등 값비싼 물건을 무덤에 함께 묻습니다. 이와 같은 무덤을 도굴하면 수익이 매우 커 위험을 무릎쓰고 도굴합니다.또한 왕교 교체기 등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는 무덤을 관리하기 어렵고, 법과 윤리가 공백이기 때문에 도굴이 수월했으며, 일부 정권은 묵인하거나 세금까지 부과한 사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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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전과 후 과정이 궁금합니다.
대체로 맞습니다. 1903년 용암포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하였으며, 결국 1904년 2월 일본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제는 곧바로 한성으로 쳐들어가 2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국에 전쟁 수행을 위한 편의제공과 군사기지 사용권을 확보했습니다. 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간섭을 위해 1904년 8월 1차 한일협약을 통해 고문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1905년 7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의 지지, 8월 2차 영일 동맹을 통해 영국의 지지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중재로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승리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습니다. 결국 11월 제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강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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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은 여러개로 쪼개져 있나요??
1206년 칭기즈칸에 의해 건설된 몽골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칭기즈칸 사후 그 후손들에 의해 원과 4개의 칸국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원'은 몽골 고원과 중국, 킵차크 칸국은 러시아와 동유럽 초원, 차카타이 칸국은 중앙아시아, 오고타이 칸국은 몽골의 서부와 신장 북부 등, 그리고 일칸국은 이란과 이라크 일대입니다. 고려는 원나라의 영토에 완전히 편입된 일반 행정구역이라기보다, 원나라에 복속된 왕국 또는 부마국에 가까웠습니다. 지도에서는 이런 종속 관계까지 넓게 표시하면서 ‘한국’이 포함된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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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와 내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의정부는 조선 초기부터 설치된 전통적인 국가 최고 정무 기관입니다. 본래 의정부는 영의정, 좌우정, 우의정이 주도했으나 갑오개혁 시기 의정, 참정, 참찬이 중심이었습니다. 의정부는 왕의 명령과 재가가 비교적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1895년 2차 갑오개혁과 1907년 내각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는 근대적인 중앙 행정 기관입니다. 총리 대신, 각부의 대신이 중심이었습니다. 내각은 내각 회의를 통해 국정 운영하는 서구식 행정 체제입니다. 또한 1895년 6월 8도를 23부로 개편했는데, 이는 중앙의 내각과 연결되는 지방 행정 체계를 만들려는 개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관파천 이후 1896년 8월 23부를 폐지하고 13도제가 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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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부와 의정부 분리 언제까지 되어있었나요
궁내부와 의정부가 분리된 것은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입니다. 갑오개혁으로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분리하기 위해 궁내부와 의정부가 분리된 것입니다. 이는 국왕이 모든 국정에 직접 관여하던 체제를 제한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895년 2차 갑오개혁으로 의정부는 내각으로 바꾸었으며,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다시 내각을 폐지하고 다시 의정부로 환원했습니다. 그렇다고 왕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갑오개혁 당시의 내각은 일본의 영향과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했지만, 고종은 이후 다시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특히 대한제국 수립 뒤에는 궁내부와 황실 재정을 확대하여 황제가 직접 국정을 장악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하지만 일제의 국권 피탈이 본격화 된 이후 1907년 의정부를 다시 내각으로 바꾸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으로 관련 기관들이 폐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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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전략은 무엇인가요?
거란의 1차 침입 다시 서희는 적장 서희와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물리쳤습니다. 서희는 전략은 우선 거란의 침략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란이 고려를 정복하는 것보다는 고려가 중원의 5대 10국의 분열기를 종식한 송나라와 가까워지는 것을 막으려했다는 것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서희의 논리가 통했습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강조하며, 압록강 동쪽 땅이 고려의 영토라는 주장을 설득력있게 주장했습니다. 또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통로를 개척해야 거란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강동 6주를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서희는 단순히 “고구려 땅이니 돌려달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거란의 군사적 목적과 외교적 불안을 이용해 ‘거란이 원하는 외교적 이익’과 ‘고려가 원하는 영토’를 맞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강동 6주는 전투가 아닌 협상으로 얻은 대표적인 외교적 승리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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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어원을 따라가면 그 배경과 역사를 알수 있어 참 재미있습니다ㅡ 시그니쳐의 어원은?
시그니처(signature)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라틴어 signum은 '표시'나 '기호'를 뜻했고, 여기서 '표시하다'라는 뜻의 'signar'가 생겼습니다. 이후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의 signature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문서에서 이름이나 표시를 남기는 서명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의미가 넓어져 문서에서 하는 서명, 어떤 사람이나 가게를 대표하는 고유한 특징,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를 의미하는 '자신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시'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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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가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를 구제한 영웅이 된 과정은 무엇인가요?
잔다르크는 백년전쟁 중 프랑스가 절체정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등장해 오를레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성사시킨 영웅입니다. 프랑스는 백년전쟁 초기 잉글랜드에 연패하며 북부 대부분을 점령당하였습니다. 특히 잉글랜드군이 루이르 강 유역의 전력 요충지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는데, 이 곳이 함락되면 샤를의 세력권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당시 잔다르크는 계시에서 '프랑스를 구하고, 샤를을 랭스에서 왕으로 즉위시켜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429년 4월말 구원군과 함께 오를레앙에 입성하여 병사들을 독려하고, 약 7개월간 포위를 풀어 해방시켰습니다. 그녀는 오를레앙 이후 루아르 강 유역의 잉글랜드 거점을 연이어 탈환하는 원정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가 대관식을 하도록 합니다.하지만 1430년 5월 콩피에뉴 근교 전투 중 부르고뉴군에 포로로 잡혀 잉글랜드군에게 넘겨졌으며, 결국 이단으로 화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1456년 재심으로 무죄가 인정되었으며, 1920년 가톨릭 성녀로 시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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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황제인 차르와 독일의 황제인 카이저는 어원이 똑같다던데 진짜인가요?
독일의 '카이저'와 러시아의 '차르'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는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율리어스 카이사르를 말합니다. 그리 그의 양아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국 초대 황제가 되면서 '카이사르'가 황제 권위의 상징이 되었으며, 후대 황제들의 칭호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라틴어 'Caesar' 가 게르만어 'kaisaraz', 그리고 독일어 'Kaiser'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짜르(Tsar)'로 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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