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에 있는 대안리 고분은 고구려에 관한 어떤 것을 알게 해주나요?
디안리 고분은 평안남도 남포시 대안구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입니다. 1959년 발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으며, 나주에도 같은 이름의 백제 옹관묘 고분군이 있어 혼동하기 쉽습니다. 대안리 1호분은 널길, 앞방, 용도, 석실로 이어진 이실묘이고, 석실은 팔각말각 천장입니다. 벽화는 앞방에 수렵도, 행렬도, 용도에 무사, 석실 상단에 주인공 집안 생활과 건물, 인물, 직조 장면, 하단에 사신도, 천장에 구름, 불꽃, 보륜무늬, 해, 달이 그려져 있습니다. 출토 유물로는 관못과 관고리 뿐이고 도굴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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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지배(타타르의 멍에)는 러시아 역사에 어떤 장기적 영향을 남겼나요?
몽골 제국의 바투 원정대에 의해 침공된 이후 약 240년간 러시아를 지배했습니다. 몽골의 지배는 러시아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장 널리 지적되는 것이 전제 정치의 강화입니다. 러시아 공후들은 황금 호르드의 수도 사라이에서 절대군주제의 작동 방식을 직접 목격하고, 징세, 상거래, 외교, 역참, 불복 신하를 다루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이는 훗날 모스크바 전제국가의 토대가 되었습니다.키예프 시대의 시민회의 베체가 소멸되고 지방 자치 전통이 단절되었으며, 징세, 인구 조사는 농노제 성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권위가 무너진 공백을 정교회가 민족 정체성의 담지자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도시 파괴와 경제, 문화 쇠퇴로 서유럽과 격차가 심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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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스터치 행운 청사초롱 나왔더라고요!
청사초롱은 청사(푸른비단) 바탕에 홍사(붉은 비단)로 상하단을 두른 등롱입니다. 조선 후기 왕세손이 사용했고, 일반인은 혼례식에서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청사초롱을 사용한다는 것은 혼례를 뜻합니다. 때문에 색은 음양 사상을 담고 있는데, 홍색은 양, 청색을 음을 상징하여, 음양화합과 부부의 금실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정2·3품 관리가 밤길을 다닐 때 쓰던 것이고, 정1품은 홍사초롱을 썼습니다. 평민도 혼례 때만은 청사초롱을 쓸 수 있었습니다.물론 다이소 재료로도 전통 등을 만들 수 있습니다. 등틀을 만들고, 색 한지로 외피를 만들어 LED 양초를 활용하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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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왜 붕당 형성의 중요한 근거지가 됐나요?
16세기 사화로 피해를 본 사림들이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서원은 붕당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습니다.붕당은 정파적 차이에 따라 분당되었지만 학파를 기반으로 합니다. 서원은 같은 학맹의 사제, 유생을 한 곳에서 모아 학연을 만들고 확대했습니다. 따라서 서원은 지방 사림의 여론을 모아 중앙 정계에 전달하는 하부 구조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서원에서 누구를 제향하느냐가 중요한 정치적 입장 표명으며, 향약 등을 통해 사족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액을 받으면 토지, 노비, 면세, 면역 혜택까지 있어 경제적 특권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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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대해서 궁금해요.
6.25 전쟁 중 낙동강 방어선은 북한군이 넘지 못한 남한의 최후 보루였습니다.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넘지 못한 가장 큰 원이는 보급 문제입니다. 북한군이 남하하면서 보급선이 길어졌으며, 미군이 중간 및 후방 기지를 파괴하여 물자와 병력 보충이 차단되어 전진을 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유엔군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 장비, 물자를 계속 공급하여 보급 격차가 컸습니다.그리고 유엔군은 공군, 해군 함포, 포병, 전차에서 우위를 유지했습니다. 방어선이 좁아지면서 병력을 밀도 있게 배치할 수 있었고, 내선작전(interior lines) 으로 위기 지점에 예비대를 신속히 투입했습니다. 또한 북한군은 병력을 한 지점에 집중해 돌파하기 보다는 방어선 전역을 분산시켜 결정적 돌파점을 만들지 못한채 소모전에 빠진것도 문제였으며,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은 전진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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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에 관한 협약, 조약 부분에 대해 알려주세요
"비엔나 협약'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조약에 관한 기본법은 1969년에 합의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VCLT)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VCLT는 1969년 5월 23일 채택되었으며, 1980년 발효되었고, 8부 85조로 구성됩니다. 국가간 서면 조약에 적용되며, 조약을 '명칭과 무관하게 서면으로 국가 간에 체결되어 국제법에 따라 규율되는 국제적 합의'로 정의합니다. 핵심은 '성실 이행', '강행규범', '상황 변경 원칙' 등이고, 조약의 무효, 종료, 정지를 다루는 5부가 중심입니다.조약과 신사협정의 차이는 법적 구속력에 있습니다. 조약은 법적 권리 의무가 있으며, 국가책임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신사협정은 구속력 없이 신의에 기초한 정치적 약속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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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분 사진을 걸어 놓은것이 좋은지
고인의 사진을 계속 걸어두는 것이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가족의 선택입니다. 다만 사진은 빛에 바래 변색될 수 있어 원본은 내려서 보관하고, 복제본을 걸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보관은 온도와 습도를 고려하여 서늘하고 어두운 곳이 적정합니다. 무산성, 무리그닌 앨범이나 보관함에 평평하게 눕혀 놓은 것이 좋습니다. 물론 방습제를 함께 넣어두면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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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는 왜 인도까지 진출했다가 결국 회군을 결정하게 됐나요?
알렉산더가 326년 히다스페스 강에서 포루스 왕을 격파하였지만 희생이 컸습니다. 그 이유는 인도의 코끼리 부대와 몬순 폭우 때문입니다. 게다가 8년간의 원정으로 병사들의 피로와 향수병으로 괴로워 했습니다. 그리고 갑옷과 무기의 마모로 낡았으며, 보급이 어려웠습니다. 반면 미지의 땅에 대한 두려움과 난다 제국의 압도적 규모도 병사들의 진격을 멈추는 요인이 되었습니다.따라서 코이노스를 대표하여 병사들이 귀향을 요청하였으며, 알렉산더의 수용에 따라 회군한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사흘 동안 천막에 틀어박혀 있다가 결국 병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회군 지점에 12개의 제단을 세워 원정의 끝을 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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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되고 한국은 안되는 이유??계엄령을 일으킨 주체는 내란 유발당이다^^?
우선 수괴는 머리와 우두머리를 합친 한자어로 부정적 집단의 우두머리를 의미하고 북한 용어는 아닙니다. 원래 형법 87조에 내란죄는 '수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다 2020년 12월 형법 개정으로 어려운 한자어 수괴 대신에 순우리말인 우두머리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계엄에 대해서는 2026년 2월 19일 법원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1심 무기징역을 선고한 상태입니다. 미국은 한국 헌법 제 77조와같은 계엄 조항이 헌법에 명시되지 않아 오히려 대통령의 계엄 권한이 불분명한 나라입니다. 역사상 계엄은 있었지만 대부분 주지사 권한이나 전시 예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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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역사적 인물을 그린 초상화라도 작품마다 얼굴이나 체격이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화가가 실제 모습을 기록하는 것 외에 의뢰인의 신분이나 권위를 표현하려 했기 때문일까요?
초상화는 실제 모습을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권위와 신분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미술사학자들은 초상화의 진짜 역할을 닮은보다 설득으로 보는 것입니다. 권력자의 초상화에서는 정확한 얼굴보다 권위의 표지가 더 중요합니다. 즉, 결점없는 젊고 건강한 몸, 곧은 자세, 위엄, 왕관 등 권력 상징물 등을 포함하여 묘사합니다. 이는 통치 정당성과 신성을 부각하는 정치적 선전입니다. 예를 들어 정당성과 신성을 시각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초상화는 왕권을 신적 권위와 연결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중세 초상화는 실제 모습보다 인물이 영원히 기억되길 원한 방식을 담았습니다. 또는 화가의 이상화 관습, 외교적 필요 등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헨리 8세의 초상화는 정치적 요구에 따라 조작되었고, 앤 오브 클리브스는 초상화와 실제 모습의 차이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초상화는 “누가,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그렸는가”를 함께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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