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는 왜 후기로 갈수록 순수한 정치투쟁에서 세도정치로 변질됐나요?
16세기 선조 당시 등장한 붕당 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공론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제한된 관직과 경제적 이득을 놓고 분당한 것으로 정파적, 학파적 이해관계에 의해 나뉘어졌습니다.그런데, 후대로 갈 수록 공존 체제는 붕괴되고, 북벌논쟁, 예송논쟁 등으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일당 독재의 환국 정치로 변질되었습니다. 물론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도 시행했으나 강력한 왕권 아래 일시적 억제에 불과했습니다.그런데, 어린 왕이 즉위하자 왕권이 약하되고, 왕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비변사와 군영을 장악하면서 세도 정치라는 변태적인 정치 형태가 등장한 것입니다.이로써 유교적 관료 정치는 무너지고 척족이 국정을 농단하는 시대로 변질된 것입니다. 세도 정치는 조선 후기 사회 모순이 축적된 결과이자 근대사회로 넘어가기 직전의 극소수 권세가 중심의 정치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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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왕은 불교로 개종한 후 왜 통치방식을 완전히 바꿨나요?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입니다. 특히 아소카왕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혔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261년 칼링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상, 부상 등의 인명 피해를 목격하면서 승리의 기쁨 보다는 후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의 전쟁을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폭력에 의한 지배가 아닌 부처님의 자비에 의한 통치를 결정하게 됩니다. 아소카왕은 불교의 비폭력과 자비, 그리고 계급주의 거부를 수용하여 통치 원리로 삼고, 무력 정복이 아닌 법의 정복으로 전환하게 됩니다.아소카왕은 살상 금지, 인간 관계의 자비, 선 실천, 불교 및 종교 시설 지원, 성지 순례 장려 등을 비문에 새겨 알려 다르마 통치를 구체적으로 실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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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는 왜 냉전 이후 국제질서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평가받나요?
냉전은 한반도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1991년 소련 붕괴로 사라졌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9.11테러 이후 세계는 또다른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국가간 전쟁 중심으로 안보 패러다임을 생각했으나 이후는 테러가 중요한 안보 패러다임으로 바뀐 것입니다.9.11은 19명의 텔러리스트가 민간 항공기를 무기로 삼아 미국 본토를 타격함으로써 국가가 아니어도 초강대국을 상대로 안보를 마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공산주의와 전쟁이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선제적 자위권권 예방적 논리를 앞세워 이라크 전쟁 등을 촉발시켰습니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미국의 주장에 동조하여 테러와 반테러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연대가 형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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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 사람들은 왜 남미로 많이 도피했을까요?
나치 전범들이 남미로 많이 도피한 이유는 은신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남미 국가들은 제 2차 대전의 주요 교전국이 아니고 유럽, 소련의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따라서 전범 체포, 송환과 압박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미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적어 신분을 숨기고 살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백인 비율도 높고, 독일계 이민자도 많아 언어, 문화적 동화가 수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 파라과이 스트로스네르, 브라질의 권위주의적 흐름이 전범들에게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페론 정권 등은 나치 전범들이 가져온 자금과 기술을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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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기병들은 척박한 초원에서 시작해 단기간에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휩쓸며 중무장한 유럽 기사단까지 모조리 궤멸시킬 수 있었나요?
몽골 기병이 척박한 초원에서 출발해 단기간에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고 중무장한 유럽 기사단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기동성, 조직력, 전술이 결합된 것입니다.칭기즈칸은 부족 중심의 구체제를 해체하고 10호, 100호, 1000호, 만호으로 구성된 천호제를 구축했습니다. 이는 소규모 부대도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신속한 집결과 분산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몽골 기병은 1인당 3~4마리의 말을 교대로 사용하여 장거리 원정에서도 속도를 유지힐 수 있었습니다. 어릴적부터 말과 친하게 지내 능숙한 기마 능력도 전투력 유지에 도움이 컸습니다. 전술적으로는 몽골군의 기본 전술은 척후병으로 정보 수집, 전장 선택, 산개 대형, 포위 섬멸이었고, 퇴각하는척하면서 적을 유인한 뒤 역포위하여 각개격파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또한 몽골군은 별도의 보급없이 육포, 유제품으로 식량을 조달해 원거리 원정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몽골군은 단순히 용감한 기병이 아니라, 조직·기동·전술·보급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결합된 ‘최초의 근대적 군대’에 가까웠기 때문에 단기간에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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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은 왜 각각 특정 학자의 학맥과 연결되어 형성됐나요?
조선의 붕당은 특정 학자의 학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였으며, 관료 등용과 정책 논의 모두 성리학적 도덕 이론에 기반했습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더라도 이어집니다. 이는 인맥, 지역, 혼맥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붕당의 기반이 됩니다.동인은 영남 사림 중심으로 이황 학통을 정통으로 자처하며, 서인은 이이, 성혼의 학통을 계승합니다. 17세기 이후 붕당들은 상대방을 소인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군자로 공인받기 위해 주자학의 군자-소인 붕당론을 정치 투쟁의 논리로 활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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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은 어떻게 10년 가까이 추적을 피할 수 있었나요?
오사마 빈 라덴이 10년 가까이 추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파키스탄의 정보, 안보 체계의 부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빈 라덴은 9.11 테러 직후 파키스탄 국경 지대로 빠져나갔습니다. 이후 파키스탄 내에서 여섯 곳 이상 거처를 옮겨 다니며 6년간 은신했습니다. 그런데 파키스탄 정부의 국가 차원의 무능과 태만으로 9년동안 숨어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보타바트 저택은 높은 담장, 철조망, 이상한 구조, 차량 방문객 부재 등 수상한 점이 많았지만 아무도 눈치채재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역시 최강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색에 한계와 인지적으로 편향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파키스탄 국경의 산악 부족 지역에 은거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입니다. 빈 라덴이 아보타바드 처럼 군사 요새 도시나 대도시 지역은 은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또한 빈 라덴은 인터넷·전화를 끊고 외부 접촉을 최소화하며 신뢰하는 조력자 네트워크만 이용해 철저히 은밀히 생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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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의 고바우와 권상사는 실존 인물인가
야인시대의 고바우의 실명은 주요한으로 유지광의 후배, 동대문상연합회의 별동대 참모진에 속합니다. 대학생 출신으로 머리가 좋아 유지고아을 보좌하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1960년 4·18 관련 시위·고대생 습격 사건 등을 주도하다 구속·처벌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권상사의 실명은 권위혁으로 군대에서 상사로 제대하여 권상사로 불립니다. 유지광 사단의 별동대 행동대장 역할을 하였습니다. 화랑동지회, 동대문파에서 활동하며 장충단 집회 방해 등에 연루되어 1958년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언도받았습니다. 나이상으로는 드라마에서 도쿠야마와 함께 유지고아이 초기 동료로 나오며, 권상사와 고바우는 도꾸야마보다 아래로 묘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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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권의 역사속 강한인물의 상징은 누구입니까?
여포와 항우는 실존인물로 삼국지연의를 통해 무공이 출중한 영웅으로 묘사됩니다. 서양에서 힘과 무용으로 상징되는 주인공은 '헤라클래스'입니다. 헤라클레스는 초인적인 힘을 대표하는데 12과업이 모두 괴물, 야수, 난제 무력 돌파로 근력과 용맹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로마 제국부터 오늘날까지 헤라클래스는 강한 남자의 코드로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삼손, 아킬레우스, 알렉산드로 대왕 등이 있지만 헤라클래스가 가장 보편적인 힘의 영웅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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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남궁원청 대장군이 시대의 천재라 하던데 실제 어떤 업적들이 있나요?
남궁원청은 고려 성종 때 대장군,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경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문무에 모두 능했다고 합니다. 특히 성종 때 종 3품 대장군이 되어 여진족을 백두산 북방까지 몰아내는 전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전후 정2품 문하시장평장사에 오르고 감물아백(함열백)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함열 남궁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천재'라는 일컫는 것은 함열 남궁씨 가문 전승에서 문무겸비로 칭송되면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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