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석빙고는 실제로 존재하던걸깡여?
석빙고는 실제로 존재한 조선시대 냉장 시설입니다. 석빙고는 돌로 만든 얼음 창고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여름까지 녹지 않게 보관하던 시설입니다. 신라시대 지증왕 6년에 왕이 얼음을 보관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삼국시대부터 축조하여 사용한 것으로 짐작합니다. 현재 서울에는 석빙고 터만 남아 있고, 현존하는 7개의 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 축조된 것입니다. 경주, 안동, 창녕, 청도, 현풍, 영산, 해주에 남아 있습니다. 석빙고는 따을 깊이 파고 내부 벽을 돌로 쌓아 지하에 일정한 온도를 활용하였는데, 물이 자연스럽게 경사진 바닥으로 배수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아치형 천장과 환기구가 있으며 강가 위치하여 얼음을 쉽게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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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고나니 유명했던 사람들도 어느새
살아서 세상을 떠들썩했는데, 막상 세상을 떠나면 시간이 흐르며 잊혀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사람은 세상을 이롭게 하고 돌아간 사람입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운동가로서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었습니다. 무저항과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영국 식민 지배에 맞섰습니다. 그는 인도 독립을 이끌어냈으며, 이후 인권 인권 운동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기억납니다. 그는 27년간의 감옥 생활에도 불구하고 화해와 용서를 선택하여 인종 차별 체제를 평화적으로 무너뜨린 인물입니다. 또한 애플을 창립하고 아이폰, 아이패드 등으로 디지털 시대를 연 혁신가 스티브 잡스도 유명합니다. 그는 기술과 디자인의 융합으로 일상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꾼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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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시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광개토대왕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로, 이는 그의 업적과 존칭을 모두 담은 12자의 시호입니다. '국강상'은 '나라의 언덕위'로 왕의 무덤이 있는 장지를 가리키고, '광개토경'은 국토의 경계를 널리 넓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평안'은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다는 의미이고 '호태왕'은 훌륭하고 위대한 태왕이란 뜻입니다. 전체를 연결하면, "나라의 언덕 위에 묻히셨으며, 국토를 널리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린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란 뜻입니다. 다른 국왕들의 시호는 광개토대왕처럼 길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고구려 국왕의 시호는 2~4자의 짧은 시호였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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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왕의 친위대 같은 세력들이 있는데 고증의 친위대 같은 세력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조선시대 모든 국왕에게는 공식적으로 금군이라는 친위군을 운용했는데, 시기별로 그 명칭과 조직이 변화되었습니다. 태조는 의홍친군위, 태종은 내금위과 겸사복, 세종은 우림위를 추가하여 3위 체제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효종은 금군청으로 일원화하였으며, 정조는 장용영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개항 이후 무위영을 설치했으나 이후 친위영으로 바꾸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친위대를 중심으로 호위대와 시위대를 운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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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과 여진족은 어떻게 한족을 지배하게 되었나요?
몽골족과 여진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한 수단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몽골족은 칭기즈칸의 지휘 아래 부족제를 바탕으로 천호제를 조직하고 최강의 기병대를 운영하였습니다. 또한 청을 세운 누르하치도 13벌의 갑옷으로 시작하여 강력한 팔기제를 통해 명을 무너뜨렸습니다.몽골족과 여진족은 이원적 통치를 통해 한족을 차별하여 통치하였습니다. 몽골 제국은 몽골족을 정점으로 색목인을 우대하고, 한인과 절대다수의 남인을 지배했습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행정적으로 여진족은 부족제를 바탕으로 군사제도를 병행한 맹안모극제, 한족은 주현제를 통해 이중 통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만한병용제, 한족 등용을 하였지만 변발과 호복을 강요하였으며, 문자의 옥을 통해 한족을 통제했습니다. 특히 청은 한족 지배층인 신사층을 이용하여 한족 전체를 효율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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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목인은 원나라에서 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나요?
색목인은 몽골 제국 당시 몽골인 다음 지배계층으로 위그르, 탕구트, 튀르크, 페르시아, 아랍 등 서역 출신의 다양한 민족을 포괄합니다. 색목은 여러 종류라는 의미로 눈색깔과 무관합니다. 몽골인들은 정복과 군사적 측면에서는 탁월했지만 광대한 영토를 지배할 행정, 재정 운영에는 능숙하지 못했습니다. 색목인 가운데는 상인, 기술자, 학자, 금융업자가 많았는데, 이들에게 행정실무와 재정 관리를 맡긴 것입니다. 특히 재정 분야는 거의 색목인이 담당했습니다. 또한 절대 다수의 한인과 남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몽골인을 대신한 준비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색목인은 중국 현지 사회에서 평판이나 유교적 질서에 얽매이지 않아 정책 집행과 좌고우면 없이 할 수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색목인은 몽골인의 행정 능력 부족을 보완하고, 한족의 힘을 견제하며, 중립적 실무 집행자 역할을 함으로써 원나라 통치 체제의 핵심 기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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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한 것으로 갑판 위에 덮개를 씌우고 쇠송곳을 박아 적의 승선과 백병전을 원천 차단했습니다. 적진 깊숙이 돌진하며 전열을 무너뜨리는 돌격전에 특화된 전함입니다. 특히 용머리 형태의 총각과 포문으로 적선을 직접 부수거나 근접 사격이 가능했스니다. 또한 전후좌우 14개의 화포가 장착되어 포위당해도 공격이 가능하고, 덮개 덕분에 갑판 위 전투 요원이 적의 공격에 직접 노출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거북선은 덮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돌격 외에는 운용이 쉽지 않았고, 판옥선에 비해 승선 인원이 제한되었습니다. 내부가 좁고 구조상 화물 운반이 불가능하고, 유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단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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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장소들은 어디인가요?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영은 본거지를 옮겨 다닌 것이 통영과 여수간 역사 논쟁의 핵심입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이 1593년 처음 설치된 곳은 한산도 진영으로 현재 통영시 한산면입니다. 이곳은 한산대첩 이후 본영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여수와 전남측에서는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가 첫 통제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 패배 이후 한산도 통제영이 파괴되자 수군 재건을 위해 일시적으로 고하도, 고금도(완도)에 설치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1603년 두룡포(통영시 문화동)에 자리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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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위협했던 태평 천국이 결국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851~1864년 청나라를 위협했던 태평천국은 허무하게 멸망하였습니다. 우선 내부적으로 지도부의 내분입니다. 지도부의 내분과 권력 다툼으로 부패에 빠졌으며, 양수청 등 주요 지도자들이 서로 살해하며 조직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상제회는 사이비 기독교 이념을 차용하여 전통 유교 사회와 서양인 모두에게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족 신사층의 향용 조직과 서양의 개입으로 실패했습니다. 증국번의 상군, 이홍장의 회군 등 한족 출신의 신사들이 향용을 조직하여 진압에 나섰으며, 영국을 중심으로 서양 열강들이 청나라를 지지하면서 태평천국이 진압된 것입니다. 결국 1864년 홍수전이 사망한 직후 천경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은 멸망했습니다. 내부 분열과 이념의 한계, 외부의 강력한 군사적 압박이 결합되어 14년간의 대반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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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높은 건물을 지으려고 햇엇을까여?
인간이 높은 건물을 지으려는 욕망은 종교, 권력, 경제,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대 문명의 인간은 신과 접근하려는 의지를 높은 건물에 반영하였습니다. 성경의 바벨탑은 하늘에 닿아 이름을 남기려는 인간의 오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의 영혼이 올라가는 통로로 피라미드를 세웠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 높은 건물은 권력을 상징합니다. 왕과 독재자는 거대 건축으로 자신의 통치력과 체제의 위해함을 과시했습니다. 브르즈 칼리파, 롯데 월드 타워 등도국가와 도시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랜드마크입니다. 그리고 19세기 말 마천루는 도시 인구 집중으로 땅값이 오르자 같은 면적에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높은 건물을 지었습니다. 또한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중력을 거스르는 성취감, 자아와 명예를 후세에 남기려는 욕망, 기술 진보에 대한 낙관 등이 높은 건물을 짓는 동기기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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