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광복절이 왜 8월15일 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을 한다고 NHK 라디오방송을 통해 공식 발표를 하여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이 일본제국의 조선총독부의 통치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모든 시스템이 조선의 것으로 완벽히 그 시점에 되돌려졌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일본 패망의 시점이므로 그 날을 국권을 회복한 날이므로 광복절로 기념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법에 의해 정해졌습니다.대한민국의 광복절과 같은 의미로 해방, 독립,승전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기념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나라는 북한, 호주, 네덜란드, 뉴질랜드, 영국입니다. 미국, 중국, 대만은 9월2일을 승전 기념일로 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은 9월 3일입니다. 연합국의 공식 항복 조인식이 9월2일이었기에 그날로 광복절을 정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의 공식 항복 조인식은 9월9일에 미국 입회 하에 조선총독부에서 이뤄졌으니 그 날을 주장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광복의 의미를 두고 어느 날에 기념하는가는 각국 정서에 따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공식문서에 사인한 날이든, 항복 선언을 한 날이든 각 해당국에 더 큰 의미를 가진 날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 날을 잊지 않고 순국선열들을 기리고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Q. 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국의 전체를 장악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명나라가 과거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세워 관리하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의도였죠. 하지만 당시 군부의 실권자였던 최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당시 왕이었던 우왕(공민왕)을 설득하여 요동을 먼저 치자고 하며 전쟁으로 맞서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안되며, 여름이라 농번기로 군사를 모으기가 어렵고, 많은 군사를 이동시키면 남으로 왜구가 쳐들어오며, 여름에 장마가 지면 덥고 습해 전염병으로 전쟁이 어렵다는 4가지 이유로 전쟁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군부의 실권자이자 왕권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최영은 자신의 뜻대로 요동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이 때 최영 자신이 8도 도통사가 되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선봉으로 하여 전쟁을 시작하거 됩니다.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압록강이 불어났다는 이유로 2주를 지체하게 되고 회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반드시 회군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조민수와 논의하여 회군을 결정하였고, 왕명과 최영의 명을 어겼으므로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개경을 공략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유배 보낸 뒤 죽여버립니다. 이후 바로 새로이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고 우왕(공민왕)의 아들을 창왕으로 세읍니다. 이후 함께 역모를 한 조민수와 권력 대립하다 조민수도 유배를 보내게 만들고 창왕도 폐위한 후 다시 공양왕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과거 최영이 가졌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이러한 권력이 결국 조선 건국의 초석이 됩니다. 이후 가신들과 주변의 권유에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던 이성계가 왕에 오르고 국호는 과거 고려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하여 옛 국호에서 살펴 조선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Q. 우리나라가 전쟁 후 북한보다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0년 당시 북한은 세계 GDP순위 60위, 한국은 101위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극빈국에 속하는 나라였지요. 분단 이후 북한은 군사력 증강을 위한 기술 개발에만 집중했던 반면에 한국은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우선 식량자급자족에 집중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습니다. 1차 산업인 농업을 육성하고 2차 산업, 경공업, 3차 서비스업까지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식량자급자족을 초과하여 주식인 쌀이 남아돌고 있는 상황이지만 북한의 경우 2012년부터 자급률이 10%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원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명의 발달의 최우선 조건은 안정적인 식량의 확보입니다. 그러한 근간이 없이 발달한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유럽부흥모델이었던 마샬계획을 근간으로 하여 1960년 4월19일 이후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에게 미국이 제안한 것입니다. 이에 미국은 1~3차에 걸친 15년간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150억달러, 250억달러, 450억 달러를 지속적으로 차관 지원함으로써 발전의 기반을 닦게 됩니다. 4차부터 9차까지는 자력으로 하여 중화학공업 및 첨단공업에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의 격차는 80년대 후반부터 확연하게 보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소련의 경우도 북한에 그러한 계획을 제시하였지만, 제대로 된 원조가 되지 않았고, 공산주의 체제의 북한으로서 일의 능률도 없고, 식량의 확보도 제대로 되지 않아 모두 실패하게 됩니다. 현재도 그렇고 공산국가 중 식량의 자급을 이룬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차 산업의 기반이 제대로 되어있고, 2차, 경공업, 3차 서비스업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균형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러시아의 경우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최첨단 우주과학 기술을 가진 국가였지만, 경공업이 거의 발달하지 않아 붕괴 후 대한민국으로부터 생필품을 수입해 갈 정도였습니다. 여전히 러시아는 식량의 많은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제력의 차이는 첫째로 식량의 자급 문제 해결, 둘째로 체계적인 경제개발계획의 추진, 셋째로 우호국의 적극적인 지원, 넷째로 자유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효율성의 차이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도 최근에는 일부 자본주의 제도들을 도입하고 있고, 개선을 해나가고 있는 상황이니 조금씩은 나아질 것이고, 정신차리고 우리와 진정한 통일을 논한다면, 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대한민국이 더욱 세계로 뻗어나가고 중국과 더욱 대등하게 경제 및 외교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으로의 통일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체제의 성패는 결정이 났으니 북한 지도층들의 담대한 결정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