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삼국의 말이 서로 같아 대화가 통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백제 신라의 말은 같았다고 보아집니다. 말이 같았다고 보는 것은 여러 역사서에서 기록된 것을 본다면, 서로 회담 자리나 사신 간의 왕래에 있어서 크게 문제가 있지 않았고 통역을 두고 대화하였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현재 지역적으로 보이는 사투리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큰 불편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의 제주도 사투리를 우리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듯이 그 지역에서만 쓰는 말들의 경우에는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되나, 상인 등은 국가에 상관없이 다녔기에 지역, 물건 등을 지칭하는 명칭의 차이가 있을 뿐 어순이나 기본적인 말은 같았다고 생각됩니다.
Q. 일본 욱일기의 유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일본과 고구려, 백제는 비슷한 문화가 있습니다. 태양을 신성 시 하는 사상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을 승계하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이념에서 태양 속에 산다는 신인 삼족오(다리가 3개인 까마귀)를 신성 시 하였고,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도 동일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제의 문화가 당시 일본인 왜에도 전해졌다고 봅니다. 일본 천황가가 백제의 황가와 관계가 있었고, 그 이전 고조선 시대의 번한, 진한, 마한의 연방국가였을 때에도 왜(일본)은 마한의 영향권에 있었던 곳이었으니까요. 농경사회였던 일본의 경우 하늘을 숭상하였기에 당연히 이러한 문화가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봅니다. 일본 초대 신무 천황이 원정을 나갈 때 그를 인도한 것이 까마귀이고, 천황 즉위식 때 삼족오가 새겨진 곤룡포를 입으며 하늘을 자손(태양의 후예)라는 것을 각인한다고 합니다. 태양을 상징하는 일장기를 처음 사용했던 것은 다이카개신(645년) 이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이 아니라 붉은 색 바탕에 황색 원형으로 되어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사진 출처 : Namu wiki]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의 일장기로 바뀌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로 겐페이 전쟁 말기(헤이안시대) 헤이시 가문과 겐지 가문이 전쟁을 벌일 때 헤이시 가문에서는 붉은 바탕에 황색, 겐지 가문에서는 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의 깃발을 사용하였는데 겐지 가문이 승리하면서 이후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고, 둘째로 그냥 홍백의 조화가 운이 좋다는 설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장기가 에도시대 말기에 선박용 국적표시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 국적을 나타내는 깃발로 일반화되었다고 합니다. 욱일기는 이러한 일장기의 확장판으로 해군과 육군이 1870년 5월 15일 전쟁의 시작과 함께 사용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후 1954년에 다시 일본 자위대의 깃발로 사용되면서 동아시아를 핍박하고 짓밟았던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계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한국, 중국, 동아시아에서는 전범기로서 의미로 굳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독일 나치에 비해 전범 처벌 등이 거의 없었고, 현재에도 독일은 공식적으로 하켄크로이츠를 쓰는 것을 문제 삼고 있지만, 일본은 욱일기 사용에 아무런 제제를 가하고 있지 않아 반성하고 있지 않고 자랑스러워 하며 다시금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비판을 받으며 더욱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의 일본 사람들의 경우 이 욱일기 디자인을 운수대통의 전통적인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하며 그 역사적인 심각성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Q. 인문학에서 인문이라는게 무슨 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문학에서의 인문이라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 인간의 전반적인 근원문제를 뜻합니다. 과거에는 인문학이라 함은 이렇듯 전반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고, 그 범주에 속하는 학문 또한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포함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Q.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민족 간의 교류가 있다 보면 혼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단일 민족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외부로부터 국가를 구성함에 있어서 다민족-다인종으로 구성되었느냐 아니냐의 판단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 한반도의 경우 북쪽 대륙으로부터 이주해 온 것이 맞습니다. 우리 민족사를 고조선부터로 본다고 한다면 당시 삼한이라 함은 번한, 진한, 마한의 3개의 연방국가였습니다. 번한은 요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어 현 중국의 황하 동남북 지역인 유주 영주 북경까지 세력이 펼쳐있었고, 진한은 시베리아 지역으로부터 아래로 지금 중국의 하얼빈,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관할하였고, 현 한반도의 경우 마한으로 한반도 전체와 일본 서남부까지 관할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국가의 역사서에서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명도전, 비파형동검 등 같은 문화권이라고 볼 수 있는 고대 유물의 분포를 볼 때 그렇게 추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사의 국가의 영토의 경우 지금의 지도처럼 정확한 경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충의 지역을 명기하여 우리의 영향권이다 정도이므로, 그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고조선의 건국 이념은 하늘의 자손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치를 내세웠으나, 실제 종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한 국가 건립의 이념, 문화적으로서 하나의 민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당시 저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말갈, 흉노, 조선, 예 등 여러 민족들이 있었으므로 말과 터전은 달랐으니까요. 이러한 삼한 중 번한이 먼저 망하고, 진한은 부여국으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계속하여 민족이 남하 이주하였습니다. 이주하면서 말갈, 흉노, 예족등은 일부 이주하였겠으나, 원래의 터전에서 바뀐 국가에 예속되며, 생활을 해왔고, 현재 조선의 민족(같은 말을 쓰는 사람으로서)만이 현 한반도에 남았다고 보입니다. 원래부터 한반도에 있던 가야, 신라시대에도 역사 기록 등에 보면 서역(페르시아 등)의 사람들이 들어왔고, 신라의 왕가의 경우 흉노와도 관계있다고도 합니다.따라서 생물학적으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혼혈이 되어 섞였기 때문에 순수한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없지만,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와 비해서는 인종의 형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 동질성이 이른 시기부터 형성되어왔고 지속되고 있으며, 그 편차가 크지 않다는 점으로 봐서 형질적, 문화적 단일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Q. 영화 한산을 보고 왔는데 궁금증이 생겨 질문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명은 고자루(새끼원숭이라는 뜻) 또는 히요시로 쓰다가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고 합니다. 중간에 기노시타 히데요시라고도 썼다고 합니다.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은 오미국을 평정하면서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으면서 썼다고 하고 이후 태정대신, 관백이 되면서 일왕으로부터 받아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고 합니다.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라고도 썼고, 당시 겐지 씨족이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시계임을 자처했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탓에 조선의 기록 및 일부 문헌에는 다이라노 히데요시라고도 불리었다 합니다. 그런데 다이라노, 후지와라, 도요토미는 천황이나 종실 및 그에 준하는 쪽에서 내려준 성씨인 우지이고 실제 사용한 성씨인 묘지는 하시바였다고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우지는 쓰지 않고 묘지만 남아있기도 하니 하시바가 맞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 듯 합니다. 임진왜란이 1592년부터 1598년의 기간이니 실제성이 하시바 일지라도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왕에게 하사받은 성인 '도요토미'를 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널리 불렸던 것이 사실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