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중국의 문화 대혁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의 문화대혁명이라 함은 사실적으로 문화를 바꾸는 혁명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로 가면서 자신들의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 정책 등을 강제로 제거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은 1966~1968년 또는 1969년을 이 기간으로 보는데 파괴적인, 비판, 규탄, 투쟁, 숙청 등의 사건들을 가리키며, 모택동이 사망한 후 그를 따르던 4인조가 체포된 197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고도 합니다.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모택동의 자신의 신념에 기인한 정책이었다 보여집니다.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정책적 정당과 그에 대한 구체화로 스탈린 지배체제에 요구하였던 정권의 정통성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근간을 두었기에 그 권력기반이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모택동은 이 정통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통을 계승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정책을 구축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중국과 소련의 대립, 대약진운동과 같은 정책의 실패 때문에, 수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의 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에 모택동 개혁개방을 내세운 조정정책을 수용하여 중국경제를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겼습니다.모택동은 임표가 이끄는 군과 자신의 부인인 강청의 상해그룹을 중심으로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당 중앙의 주류파를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라고 하며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 당시 모택동이 이용한 것이 청년 학생을 중심으로 한 홍위병입니다.오늘날에도 문화대혁명의 이면에 1950년대 스탈린적 사회주의의 특권계층제제와 경직된 계획경제 등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존재하였고 개혁 개방이 시작된 후에도 1956년 이전의 황금시대로 복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현실의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을 비판하여 실각한 팽덕회의 명예 회복을 도모한 문예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를 취하였고, 모택동 등과 당 중앙의 주도권 쟁탈 후에 1966년 5월 16일 이후 모택동 주도의 파괴 단계의 문화혁명이 본격화하였습니다. 외국 물건과 책을 가지고 있어도 스파이라고 매도당하는 둥 공포정치를 하며, 상대 실권파들을 숙청, 추방하며 각 지에 통치기관으로서 혁명위원회를 설치 이후 각급의 정부로 탈바꿈하게 됩니다.문화혁명 후기에는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던 주은래와 등소평의 경제우선노선의 대립이 심화되다가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고 그를 따르던 4인조가 체포됨으로써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등소평은 개혁과 개방을 추구하게 됩니다.문화대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거창한 것 같지만, 중국 공산당 세력 중 하나였던 모택동이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추진한 무리한 정책으로 판단됩니다. 어느 나라든 정치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것인가 봅니다.[참조] 문화대혁명 [the Great Cultural Revolution]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Q. 고려말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국의 전체를 장악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고려의 군이 출병한 이유는 이러한 명나라가 과거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세워 관리하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의도였죠. 하지만 당시 군부의 실권자였던 최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당시 왕이었던 우왕(공민왕)을 설득하여 요동을 먼저 치자고 하며 전쟁으로 맞서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필패하므로 안되며, 여름이라 농번기이므로 군사를 모으기가 어렵고, 지금 많은 군사를 이동시키면 남으로 왜구가 쳐들어올 가능성이 크며, 여름에 장마가 지면 덥고 습해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다는 4가지 불가론을 세워 전쟁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최영은 군부의 실권자이자 왕권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요동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이 때 자신이 8도 도통사가 되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선봉으로 하여 진격하게 됩니다.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압록강이 불어났다는 이유로 2주를 지체하게 되고 회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반드시 회군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조민수와 논의하여 회군을 결정하였고, 황명과 최영의 명을 어겼으므로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개경을 공략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유배 보낸 뒤 죽여버립니다. 이후 우왕(공민왕)의 아들로 창왕을 세우고 함께 역모를 한 조민수와 권력 대립하다 조민수도 유배를 보내게 만들고 창왕도 폐위한 후 공양왕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과거 최영이 가졌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이러한 권력이 결국 조선 건국의 초석이 됩니다. 만약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기세가 등등했던 명나라 군사에 맞서 오랜 전쟁 끝에 고려는 패배해 항복을 했을 것이고, 원의 영향력에 있었던 것처럼 명의 영향력 아래에서 힘없는 고려왕조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전쟁에서 많은 가병들과 힘을 잃어 이성계와 그의 가문도 역모를 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원래부터 건국을 꿈꾸고 있던 이성계와 그의 가문으로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그로 인해 만약 이성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건국의 주축세력이고 브레인이었던 정도전은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서라도 자신이 꿈꾸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갔을 거라고 봅니다. 이성계도 건국을 꿈꾸었고, 정도전도 건국을 꿈꾸었으니 둘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였고, 정도전은 성리학의 나라를 건국하게끔 하였습니다.둘다 목적은 달성하였다고 할 수 있고, 위화도회군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군부를 끌어내리고, 학자들이 주축이 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어 언젠가는 조선과 비슷한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 생각됩니다.
Q. 우리나라 국보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재 대한민국의 국보는 총 336번까지 번호가 부여되어있느나 이중 3개가 중간에 지정해제되어 그 번호가 영구결번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총 333개의 국보가 있습니다. 1~336호에 있어서 그 번호에 따라 가치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2021년도부터는 국보제O호라는 것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보와 보물은 구체적인 기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 합니다. 옛건축물이나 예술작품들 중에서 역사적이거나 미술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문화재들은 보물로 지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차원에서 관리와 보호를 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작품들이 국보로 지정이 됩니다. 즉 제작연대가 오래되었고, 그 시대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것, 제작기술이 특별히 뛰어나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물이 제작하였거나 유서가 깊은 것들이 그 지정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굳이 국보와 보물을 구분해 본다면, 국보는 유일한 것, 보물은 동일 예술품 중에서 대표성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앞서 말씀드렸지만, 처음에 국보로 지정되었다가 나중에 지정해제된 것은 168호, 274호, 278호가 있습니다. 이는 168호 백자 동회매국문 병은 재감정한 결과 원나라의 양식으로 판단되어 지정해제되었고, 274호 귀함별황자총통은 발굴조작사건으로 인해 해제되었고, 278호 태종11년 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은 기존 3등 공신 마천목 정공신록이 보물로 지정되어있는데 그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지정해제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