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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메추리5923.01.19

유럽 합스부르크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어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 합수부르크라고 알고있습니다,

합스부르크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합스부르크에 유명한 사람은 누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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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합수부르크는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은 가문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황제가문으로서의 최고 권위와 영예를 누린 가문입니다.

    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우력가문이 세력권을 다투고있는 상황이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 까지만해도 알프스 산맥 언저리에 웅거하던 시골 귀족가문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7세기경부터 알자스 일대에 터를 잡으며 교황을 배출한 적도있는 대귀족인 애티오넨 가문의 방계가문으로 나름의 명예정도는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이 중 브라이스가우 백작 군트람에게 아들 로첼린이 있었고, 1020년경 로첼린의 장남으로 합스부르카가의 시조인 라트보트가 오늘날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 하비히츠부르크에 기반을 잡고 성을 쌓은 후 백작 노릇을 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아르가우 주를 벗어나 유업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는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대공위시대였으며,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하는 상황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어진 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 시대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집니다.

    대공위시대가 이어지며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교황이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고 하니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내가 황제를 하기는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것도 싫어 타협책으로 한미한 가문의 가주를 황제로 옹립하여했는데 이때 합스부르크 가문이 포착됩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은 루돌프1세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내에 세력이 큰 가문이 아니었으니 황제가문으로 고려되지 않았지만 루돌프1세에게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 대자라는 배경이있었습니다.

    황제 선거가 난할을 겪자 마인츠 대주교와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하고 황제자리를 생각도 않던 루돌프 4세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기자 독일 주요가문과 혼인동맹을 맺습니다.

    결과 1237년 루돌프 4세는 독일왕이 되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뤄 로돌프 1세로 즉위하며 대공위 시대가 종식됩니다.

    아르가우 주의 백작에서 독일의 왕이 된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합니다.

    협소한 스위스 산골짜기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확장을 모색한 루돌프 1세에게 포착된 것은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독립한 이래 오스트리아를 통치해왔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공위시대의 혼란기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황제 루돌프 1세는 독일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타카르 2세를 누르고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승리, 1278년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차지하여 장남인 알브레히트에게 주었습니다.

    루돌프가 이러는 사이,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켜 1351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가 됩니다.

    대공위 시대 직후 루돌프1세와 알브레히트 1세가 왕위를 차지하지만 알브레히트 1세가 조카 요한에게 암살당하고 제위를 룩셈부르크 가문이 차지한 후 14~15세기 동안 신성 로마제국의 제위는 유력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위에서 배제되지만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그 인근에서 기반을 다져갑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특이한 전략인 결혼동맹을 통해 세력을 늘렸으며 1335년 케르텐 공국과 크라인 공국이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반환되며 영토가 확장되었습니다.

    기존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크라인 공국이 더해지고 1263년 티롤 후백국까지 얻으며 현대 오스트리아 영토의 뿌리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 남동부 일대가 합스부르크 기반으로 자리잡고, 합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에서도 막강한 제후 세력으로 도약하며 1335년 이후 막시밀리안1세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상황을 유지합니다.

    1437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 겸 보헤미아 국왕 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1438년 황제위에 오르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기가 열렸습니다.

    16세기 카를 5세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됩니다.

    그 기반은 선황 막시밀리안1세로 , 스스로 최초의 선출황제임을 선언하며 황제 선출에서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칩니다.

    저지대를 보유하게 된 부르고뉴 공국,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연합 스페인 왕국, 동유럽에서 헝가리 왕국과 그 동군연합인 크로아티아 왕국, 슐레지엔을 포함하여 보헤미아 왕국 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야기에우워 왕조와 혼인을 성사시켰습니다.

    혼인동맹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들 가문이 모두 대가 끊어지면서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대로 인수합니다.

    15세기 중반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쾰른 등의 라인강 유역과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하에 있던 알자스 등지에서 팽창정책을 펼치던 부르고뉴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나 부르고뉴 공작이었단 용담공 샤를이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두고 선사하니, 부르고뉴와 같은 발루아 왕조이자 명목상 종구국이었던 프랑스가 유럽내 손꼽히게 부유했던 부르고뉴를 향해 야욕을 드러냅니다.

    이로 인해 부친의 급사 이후 부르고뉴의 여공작이 된 마리 드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혼인하여 프랑스가 노리던 북해 연안 17주, 플랑스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역 아래 놓이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장악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명군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손을 뻗자 브르타뉴 공녀 안과 정략 결혼을 추진하여 발루아 왕조 프랑스를 멸할 시도를 하는 등 서쪽 국경의 판도를 넓혀갑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동맹에 관심이 많았는데, 장남 필리프를 스테인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후아나와 혼인, 딸인 사르가레테는 왕세자 후안과 결혼시키면서 스페인과 결혼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은 필리프와 후아나의 아들 카를 5세가 물려받게됩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 크로아티아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야기에우워왕조와 불편한 관계에도 결혼동맹을 성사시키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되었을때 신성 로마제국 제위와 함께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위도 일시적으로 차지하나, 두나라의 지방 귀족이 실권을 쥐고 있어 왕권을 행사할수 없었고, 약2년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상실합니다.

    후,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는 야기에우워 왕조가 차지하게 되는데, 결혼동맹의 대가 막시밀리안 1세는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 울라슬로 2세의 딸 안나와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를, 안나의 동생 러요시2세와 손녀딸 마리아를 혼인시킵니다.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침공으로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며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고 두 나라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지위가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이사벨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시대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형상 최전성기를 맞으며 카를 5세가 통치하게 된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통일을 이루고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고 신대륙까지 접수에 들어간 강대국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강대국을 둘이나 가지게 됩니다.

    카를 5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저지하려던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어 붙어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 반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킵니다. 오스트리아-스페인에 의해 처참히 무너진 프랑스는 30년 전쟁으로 부활을 선언할때까지 100년동안 유럽 구석에서 버티며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필요에 따라 양측에 적절히 붙고 배신하며 자국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카를 5세는 헨리8세의 이혼과 재혼 허가조차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강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새로 위협하기 시작한 변수는 종교개혁과 오스만제국으로 북독일의 프로테스탄트의 세려글 누르기 위해 스페인군을 독일로 데려온 것이 정치적 패착이 되었습니다.

    독일인이 주류인 신성 로마제국의 일에, 동군연합이라는 합스부르크의 사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었을 지언정 결국 외국 군대인 스페인군을 개입하여 독일어권 세력들 간의 연대의식을 방해했음과 암묵의 룰을 깼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제후들은 종교와 별개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짙은 불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가 30년 전쟁, 신성로마제국

    의 무너지게 됩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영방을 분열시키며, 최전성기를 맞은 쉴레이만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동쪽 국경을 엄습했습니다.

    내전과 1592년 1차 빈 포위로 합스부르크는 광대한 영토 전면에 걸쳐 전선을 확장시켜야 했습니다.

    가히 호사다마라 할수 있는 위기였지만 카를 5세는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상의 성공과 신대륙에서 나오는 부, 그간 다져온 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가문의 유산을 지켰으나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추진되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절대왕정 수립 시도는 무산되고 영방체제가 계속되었습니다.

    유럽 전역을 석권했던 카를 5세 후 합스부르크가문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로 분열되었고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 스페인,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반도 영토,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 등 나머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양위했기 때문입니다.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2세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시조로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2세에게 부유한 저지대와 식민지를 물려줬지만 형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1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추진한 결혼 덕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막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어 페르난디트 1세 후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최강자가 됩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왕조에 귀속되었던 저지대 국가는 펠리페 2세의 폭정으로 북부 7주인 네덜란드가 1648년 독립하였으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남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로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 귀속되어 약1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남았습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를 지키기 위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종교 문제에는 관대했으나 개인적인 이유로 루터파에 관대했던 막시밀리안 2세 이후 후계자들은 갈수록 종교 문제에 완고하게 대처합니다. 결국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비타협적인 종교관은 30년 전쟁을 부르게 되고 이 결과 독일은 인구가 2/3으로 급감하고 국토가 황폐해지며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합스부르크가문은 북독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지위는 명목상의 작위로 전락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흥은 18세기였으니 1638년 오스만 제국이 대규모로 침공해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지나 레오폴트 1세는 독일의 영방 제후들과 폴란드 - 리투아니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퇴각하는 오스만제국군을 추격하여 대튀르크 전쟁을 일으킵니다.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으로 가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탈환 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을 잠식합니다.

    대튀르크 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후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 여러 전쟁을 통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2차 빈 공방전에서 도움을 준 폴란드- 리투아니아를 분할하기도 했습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를 두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주장하며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하고 13년에 걸친 전쟁에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를 따는것은 성공하나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칠수는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과거 스페인령이었던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 이탈리아 영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획득하는 반명,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1세기간의 길고 느린 쇠퇴를 하게 됩니다.

    대 튀르크 전쟁의 후속전으로 치워진 6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 승리를 거두어 세르비아와 보스이나 북부 등을 획득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해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는데, 카를 6세는 살리카 법에 위배됨에도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표했습니다. 주변 세력들은 살리카 법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에 카를 6세는 주변국에게 많은 이권을 떼주거나 영토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프랑스와 접하고 있던 로트링겐의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반발이 심했고, 카를 6세는 1736년 로트링겐 공국을 신성 로마제국에서 분리시켜 프랑스로 넘겨줍니다.

    1734년 일어난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관 빈 조약에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위해 주변국들에게 양보하고 그 결과 토스카나 대공국과 파르마 공국을 획득하는 대신 나폴리 왕국과 시필리아 왕국을 내줍니다.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왕국 등 주변 여러 세력들이 아미라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계승을 반대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고 바이에른 선제후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나 그는 머지 않아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어질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결과 슐레지엔을 신흥세력 프로이센에게 뺏기고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동맹의 역전을 하며 노력하나 7년 전쟁에서 패하고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잃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동안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 반항적이었던 영지를 평정하고 북쪽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분할, 획득하게 됩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위기에 직면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마리앙투아네트를 구실로 혁명 전파를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쟁을 일으키나 혁명 프랑스군의 전투력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당하며 벨기에와 이탈리아를 뺏깁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프란츠2세는 동군연합 상태를 유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오스트리아제국을 세우고,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공동전선을 결성하나 치명상을 입고 1806년 신성 로마제국 자체가 와해됩니다.

    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서도 패하며 유일한 해안 지역인 달마타이를 뺏기고 프란트 2세 장녀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내는 등의 시기를 거치나,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을 거쳐 목락하면서 재반격에 나서 프랑스를 핀치로 몰아붙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후 처리를 위해 빈 회의세어 잃었던 영토의 상당수를 회복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후계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자 빈 체제를 주도하였습니다.

    민족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덮으며 독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고 그동안 합스부르크제국을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의 보호자로 여겼던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눈뜨기 시작합니다.

    민족주의속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건재하나 1866년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하고 통일 독일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결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역을 상실하고 분가가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도 멸망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도 상실합니다.

    패배의여파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 내에서 독일인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던 헝가리인들과 타협하여 새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합니다.

    독일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으로 서쪽으로 진출이 막히자 남쪽 발칸 반도로 진출을 시도했고,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면서 발칸 반도의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외치는데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이를 세력을 확장할 기회로 보았습니다.

    보오전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독일과 우호관계를 다진 뒤 보스니아를 확보하며 남방 진출을 시도하지만 남쪽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며 발칸반도의 판세는 복잡해집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에게 제위 계승자가 암살당하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1918년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카를 1세가 퇴위하며 합스부르크 시대가 막을 내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도 해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중장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헝가리 왕국을 복원하며 헝가리 왕위는 남았지만 명목상의 복원이었을 뿐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입국을 거부하는 등 섭정 지위로 1인 독재체제를 유지, 2차세계대전 후 헝가리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가문이 군림하는 나라는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