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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16

일제시대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시작된 것입니까

1937년 일본 제국주의 시대 있었던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어떤 배경과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은 왜 물산장려회를 해체하려고 하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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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910년대 후반 이후 공장을 설립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제의 경제정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관세 철폐로 인해 타격을 받은 조선인 자본가들은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물산을 장려하고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하자는 목적으로 대중적 경제운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3년 한때 크게 일어났던 物産獎勵運動의 배경에는 당시 조선인 토착자본이 처해있던 급박한 상황과 당시 문화운동의 핵심적 논리의 하나였던 경제적 실력양성론이 놓여 있었다. 먼저 당시 조선인 토착자본이 놓여 있었던 상황을 살펴보자. 일본 자본주의는 호황기였던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공황기에 빠져들었다. 이에 일본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에 따른 공황’을 돌파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즉 그동안 식량과 원료의 공급기지로 주로 활용해오던 식민지 조선을 한편으로는 이제 과잉생산된 상품의 수출시장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잉축적된 자본의 수출시장으로서 그 용도를 확장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일본정부는 1910년 ‘한일병합’ 때 서구열강에 1920년까지 유보하기로 약속하였던 조선에 대한 관세를 완전히 철폐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의 자본가들은 일본과 조선과의 관세가 일본과 조선의 경제권을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면서 ‘일선융화’를 해치는 관세제도를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035) 그러나 당시 총독부의 재정수입에서 관세는 지세수입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전면 철폐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일본정부와 총독부는 1923년 4월 관세 수입의 약 반을 남기는 선에서 기존의 관세를 조정하였다. 이 때 관세가 그대로 유지된 것은 주류와 직물류였다. 1920년 8월 이후 관세철폐문제가 제기될 때마다≪동아일보≫등 조선의 각 언론매체는 이 관세의 철폐가 일본산 상품이 조선에 물밀듯 밀려와 한국시장을 독점하여 자본과 기술에서 열세에 놓여 있는 조선의 공업을 형적도 없게 만들 것이며, 총독부 수입을 감소시켜 조선인들의 조세부담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라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긴 뒤 한반도에는 일본 상품이 밀려들어왔고, 이 때문에 우리의 민족 산업은 매우 이런 현상이 계속되다 보니 경제에서도 일본의 지배는 한층 심해졌습니다.

    이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 벌어졌고 이들은 우리민족 경제의 자립을 주장하며 운동 조직인 조선 물산 장려회도 만들었으며 19220년 평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1923년 1월에는 서울에서도 만들어지면서 조산 물려 장려회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합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내 살림 내것으로 라는 구호를 내걸고 국산품 사용하기, 소비 줄이기, 금주하기, 금연하기 등의 운동을 벌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 물산 장려운동을 새로운 민족 운동으로 보고 탄압을 하기 시작,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면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열기도 줄어 결국 운동이 실패하고 맙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은 우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주장하며, 운동 조직인 조선 물산 장려회도 만들었습니다. 1920년 평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1923년 1월에는 서울에서도 만들어지면서 조선 물산 장려회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새로운 민족 운동으로 보고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사람들의 열기도 줄어들어 결국 운동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0년대에는 회사령의 규정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회사의 설립이 쉬워지자, 자본력이 우위였던 일본 기업들이 조선으로 진출하려 했고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조선 내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22년을 즈음해서 일본이 관세를 철폐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운동은 조선 물산 장려회를 중심으로 본격화되었고, 자작회나 부인회 등이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물산 장려 운동은 한 마디로 범 국민적 경제 자립 운동이자 신토불이 운동이였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운동을 해체 하려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0년대 후반 이후 공장을 설립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제의 경제정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관세 철폐로 인해 타격을 받은 조선인 자본가들은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물산(朝鮮物産)을 장려하고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하자는 목적으로 대중적 경제운동을 일으켰다.

    조선물산장려회는 1923년 11월에 『산업계(産業界)』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1924년 3월 제5호까지 발행하고 종간되었다. 이후 1927년 4월에 『자활(自活)』로 다시 간행되어 12호까지 발행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다시 『조선물산장려회보』 · 『장산(奬産)』 · 『실생활(實生活)』 등으로 개칭되면서 1932년까지 간행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1931~1932년에 이르러 이사진의 3분의 2가 바뀌는 등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 국내외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1929년에 발발하였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노동자의 임금이 인하되고, 노동 조건이 악화되었고, 이에 대항한 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피폐해진 농촌에서 소작쟁의가 확장되었다. 또한 신간회에 주력하였던 민족주의 계열이 물산장려운동에 다시 관심을 가지면서 이사진 개편과 운영 방법의 변화를 모색하였다.


    1930년대 조선물산장려회를 이끈 인물들은 정세권 등의 상공업자와 김용관 등의 기술자 출신이 많았다. 정세권은 건양사(建陽社)라는 건축 관련 회사 전무로 1929년 10월부터 약 3년간 물산장려회의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담당하였다. 김용관은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일본 유학을 한 후 발명학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이사로 활동하였다.


    일제는 1920~1930년대 조선인의 경제자립운동을 계속해서 견제하였다. 결국 중일전쟁주1 이후 일제의 사상 통제가 강화되면서 마침내 1937년 2월 조선물산장려회는 해체를 결정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