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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딸을 공주와 옹주라고 부르는데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아들의 경우 왕비에게서 태어나면 대군, 후궁에게서 태어나면 군 이라고 불렀으며,딸의 경우 왕비에게서 태어나면 공주, 후궁에게서 태어나면 옹주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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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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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 화가들은 언제 활발하게 활동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야수파는 20C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이다. 야수파는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했다. 야수파의 흐름 자체는 1900년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는 했으나, 실제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데 그쳤으며 결속력도 약했다. 이 운동의 기수로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레인이 있었다.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했다.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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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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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동계올림픽은 언제 어디서 개최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동계스포츠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대회는 노르딕 게임(Nordic Games)으로 1901년부터 1926년까지 개최되었다. 한편 올림픽 쪽은 1908년 하계 런던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이 종목으로 채택되고 1920년 하계 앤트워프 올림픽 때는 아이스하키가 추가되었다. 이후 IOC는 동계올림픽을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국제 겨울스포츠 주간'을 갖기로 했다. 이를 제1회 동계올림픽으로 인정하고 4년 주기로 개최하기로 했다. 현재도 동계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를 비롯하여 여러 국제 대회가 계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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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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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시날 세계 공통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원래 음력 4월8일 초팔일로 지키지만 2월8일이 탄생일이라네여~ 그러나 인도에서 지키던 이ㅜ날짜를 기준으로 조금씩 다르게 보내고ㅠ있답니다ㅡ 대개 5월안에 다들 지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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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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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일 사건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제주 4.3 사건 배경 제주도에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민들까지도 사회주의자로 몰아 대량 학살한 사건으로 공식적으로는 사망자가 약 3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도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사건의 시작 광복 이후 1947년 3월 1일 제주도 관덕정에서 3.1 운동 28주기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그때 경찰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6살 정도의 어린아이를 치고 그냥 지나갔고 다친 아이를 살피지 않는 경찰을 보고 화가 난 군중들이 그를 잡으려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지며 쫓아가게 됩니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 군정(軍政) 기간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7년 7개월에 걸친 남한 내의 내전이었다. 총 희생자(사망자)는 2만5천-3만명으로 추산된다. 미국 군정 기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미군은 이 사건과 관련, 제주도를 '붉은섬'으로 지목했었다.해안에서 5km 이상 통행자를 폭도로 간주, 총살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제주도의 중산간 지역은 적의 땅으로 사선(死線)이 그어졌다.이 내전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것이 주 원인. 4.3사건은 종료됐으나, 분단체제가 고착화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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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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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말 목을 자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김유신이 항상 다니던 술집으로 인도한거지요. 똑똑한 말이었는데... 쯧쯧..... 물론 좋지않은 타이밍에 그쪽으로 갔지만 본인이 마음을 다스려야지 애꿋은 말 머리는 왜ㅜ잘랐데요..... 전 이내용이 항상 김유신을 안좋게 보는 대목이 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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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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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관악기와 금관악기를 분류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악기를 만드는 재료, 즉 악기의 표면이 무엇인지 재질로 일단 판단합니다.금관:트럼펫,트럼본,튜바,호른 등목관:오보에,클라리넷,바순 예외) 플륫은 재질이 금관이지만 목관에 편성됩니다.목관악기 5중주오보에,클라리넷,바순,플륫,호른 입니다. (금관인 호른이 들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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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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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은 컴퓨터통신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것인데 누가 최초로 사용하였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1982년 9월 19일 오전 11시 44분, 미국 카네기멜런대의 스콧 팔먼 컴퓨터사이언스학과 교수는 대학 게시판에 콜론(:)과 하이픈(-), 괄호())를 결합해 글을 남겼다. 지금은 웃는 얼굴을 뜻하는 의미로 흔하게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모티콘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기네스북은 이를 '최초의 디지털 이모티콘'으로 명명했다.세계 첫 이모티콘이 온라인에 등장한 지 40주년이 됐다고 19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 등이 보도했다. 팔먼 교수는 이 이모티콘을 처음 사용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아직도 인터넷 이용자들이 고민하는 온라인상의 농담 전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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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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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자중에 새우깡은 언제부터 만들어졌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농심은 1971년 12월 대한민국 최초의 스낵 새우깡을 선보였다. 연구 기간만 1년이 걸렸으며, 실험에 4.5t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를 사용했다. 우리의 제품은 우리의 기술력으로 만든다라는 각오로 개발해낸 새우깡은 출시와 동시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으며, 이러한 성공은 라면 업계 후발주자로서 낮은 점유율과 이익률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농심이 성장하는 불씨가 되었다. 이어 농심은 1978년 바나나킥, 1979년 꿀꽈배기, 1980년 포테토칩 등의 제품들을 출시하며 연달아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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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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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의 역사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첼로와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비올은 지금의 첼로와 꽤 많은 차이를 보인다. 눈으로 보이는 외관상의 차이는 악기 몸통의 모양과 현의 개수의 차이다. 첼로는 바이올린과 모양이 비슷하지만, 비올은 몸통 부분이 바이올린 족의 모양과 다른 곡선을 그리고 있는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첼로는 현이 4개, 비올은 보통 현이 6개라는 점도 확연한 차이라 할 수 있다. 비올의 경우 4개, 5개 현을 갖는 악기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저음을 내는 7번째 현이 있는 것도 있다. 또한 오늘날의 기타와 같이 비올의 지판이 ‘프렛(Fret)’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점도 두드러지는 차이다.오늘날의 첼로가 태어나기까지 몇몇 악기들이 실험적으로 태어났다 사라지곤 했다. 바흐(Bach, Johann Sebastian)가 라이프치히 칸타타를 작곡할 때 사용했던 '비올론첼로 피콜로'는 길이가 90Cm 내외인 소형 첼로이다. 그리고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을 연주할 수 있는 '비올론첼로 다모레', 19세기에 고안된 악기로 몸통음 기타와 비슷하며 줄이 여섯 개인 '아르페지오네', 첼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올라 다 감바' 등이 첼로가 등장하기 전에 첼로와 유사한 역할을 하던 악기들이다. 특히 바흐는 이 '비올라 다 감바'를 위한 다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첼로와 이 악기들은 서로 다른 악기로 모두 다리 사이에 끼고 연주하도록 되어있지만 일반적인 모양뿐만 아니라 프렛의 사용이나 울림구멍이 첼로는 f자형 모양인데 반하여 비올라 다 감바 등은 C자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많은 연주자들이 두 악기를 자연스럽게 바꾸어가며 연주했다.첼로의 전신으로 알려진 ‘큰 비올’이라는 의미를 가진 ‘비올로네(violone)’는 첼로의 현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 첼로의 현은 낮은 현에서부터 C-G-D-A 순으로 4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현들이 첼로의 음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첼로의 현은 본래 양의 창자로 만들어졌다. 양의 창자를 꼬아서 만들어진 현은 저마다 그 굵기가 달랐는데, 두꺼운 현은 울림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께가 가는 현에 비해 음량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거트현은 지금의 스틸현에 비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음색을 내지만 수명이 짧고 습기나 온도의 변화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에는 길이가 긴 현이 굵기도 가늘고 더 좋은 소리를 냈기 때문에, 첼로의 전신인 비올로네는 가능한 길게 제작되었다.하지만 현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거트현에 미세한 철선을 감은 현이 개발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철선을 감은 현은 가늘면서도 길이가 짧았으며 이러한 현의 변화로 악기의 크기도 작아지게 된다. 또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현은 거트현과 달리 오래 사용할 수 있고 조율이 편리한 장점이 있어 점차 스틸현으로 바뀌게 된다. 스틸현은 소리와 울림이 크나 음색은 바로크 첼로에 비해 날카로운 편으로 협주나 독주에는 적합하나 실내악처럼 다른 악기와 어우러지는 음악에서는 조화되지 못하는 면이 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시대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연주하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조화로운 예전의 소리로 연주하기 위해 거트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 악기에 ‘비올론첼로(violoncello)’ 즉 ‘작은 비올’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첼로는 큰 비올과 작은 비올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은 명칭을 지니게 된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올론첼로’라는 명칭으로 악기를 지칭하는 출판물도 많아졌지만, 18세기까지도 ‘비올로네’라는 명칭은 여전히 사용되었다.15세기 후반에 그 당시에 이미 있었던 비올족의 저음 악기로부터 발전된 악기로 여겨지며 최초의 첼로는 16세기 초에 나폴리의 가스파로 다 사로(Gasparo da Salo)에 의해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는 비올라 다 감바와 마찬가지 연주 자세로 두 무릎 사이에 악기를 끼워 고정시켰다. 엔드핀으로 바닥에 세우는 것이 보급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그때까지는 받침대 위에 놓고 연주하였다. 그 당시의 첼로는 지금의 첼로보다 키가 컸다. 몸길이만 해도 73Cm에서 80Cm까지로 그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710년에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제작의 대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길이를 75 ~ 80Cm로 제작하면서 크기가 작아졌다. 전체 길이는 대략 바이올린의 2배로 120Cm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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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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