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를 지내는곳이 있고 안지내는곳이 있는데요. 제사를 지내는게 원래 우리 문화가 맞는건가요?? 몽골문화아닌가요?
우리나라 제사 자체는 선사시대 제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의식이 있고 조상 숭배 사상도 삼국시대 초기부터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식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지내는 제사 형식은 고려말 수용된 성리학의 영향입니다.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편찬한 <주자가례>에 의해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기일 제사는 고대에 없던 것으로 송대 성리학자들이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일반 백성들도 제사가 보급되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몽골에도 텡그리 신앙·오보제 같은 조상 숭배 요소는 있지만, 가정의 기제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오히려 몽골은 조상 제사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아 "거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설명되며, 1주년에 무덤을 찾는 정도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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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사후 제국은 왜 하나로 유지되지 못하고 분열됐나요?
323년 알렉산더 사후 제국이 무너진 이유는 후계자 없기 때문입니다. 이복 형 필리포스 3세는 왕위 계승 자격은 있었지만 인지 장애였으며, 아들 알렉산더 4세는 알렉산더 사후에 낳은 유복자였습니다. 결국 두명의 왕이 공동 즉위했지만 둘다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고, 이들은 곧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장자 상속이 아니라 군대 추인으로 왕이 결정되는데, 한 세대에 한번 꼴로 계승 위기로 흔들렸을 정도 불안정했습니다. 또한 행정적으로 통치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고, 군대는 국가가 아닌 알렉산더에게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알렉산더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국,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서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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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4'를 피하는 건 한자 문화권뿐인데, 서양은 왜 숫자 '13'을 그토록 불길하게 여길까요?
동아시아에서 숫자 4는 "죽을 사"와 발음이 같아 불길하게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13이라는 숫자를 불길하게 여깁니다. 핵심 뿌리는 1774년부터 '식탁에 13명이 앉므면 한 명이 곧 죽는다'는 미신 관련 기록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12가 완전 숫자라 그 다음수인 13을 불완전한 '하나 더'로여깁니다. 최후의 만찬, 로키, 성전기사단, 함무라비 법전 같은 유명한 기원설은 대부분 나중에 끼워 맞춘 것입니다. 즉, 동양에서는 발음에서 나오는 금기, 13은 이야기와 관련된 금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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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서 어떤 물건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없다는 것'이 그 자체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있었다마면 흔적이 남았을 것이라는 기대가 성립될 때만 약한 증거로 됩니다. 즉, 인지와 기록, 보존 하나라도 무너지면 추론은 급격히 약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젯밤 도둑이 들었다면 금고가 텅 빈 것만으로도 "훔쳐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반드시 흔적이 남으니까요. 하지만 "도둑이 화분을 만지고 갔다"는데 화분이 멀쩡하다면 그건 증거가 못 됩니다. 만지고도 흔적이 안 남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판단할 때는 세가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남은 만한 것인지', '제대로 찾아봤나', '다른 설명은 없나'입니다. 이 세가지 모두 그럴듯하다고 넘어가면 신뢰도가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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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은 왜 시대에 따라 평가가 계속 바뀌어왔나요?
삼국지 인물의 평가가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은 시대 해석의 툴에서 나온 것입니다. 관우는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일개 장군이었지만 수당 때는 무성왕묘 종사를 통해 국가 사전에 편입되었으며, 송원시대에는 후에서 공, 그리고 왕으로 추존되었습니다. 그리고 명, 청시대에는 왕을 넘어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신격화의 결정적 배경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덕분입니다. 반면 조조는 반대 방향으로 다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정사에서는 뛰어난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남송 시대 주자에 의해 간웅, 난신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이후 원대의 삼국지평화와 명대의 삼국지연의가 부정적 이미지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20세기 조조의 평가가 달라지고 있는데, 1919년 신문화 운동을 계기로 뤼쉰, 장티이엔, 궈모뤄 같은 지식인들이 조조를 다시 평가하면서 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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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반군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후티반군은 예멘 북부 자이디 시아파를 기반으로 하는 군사, 정치 조직입니다. 정식 명칭은 안사르 알라이고, '후티'는 차이자 후세인 알후티의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1990년대 자이티 시아파 부흥운동 출발해 2004년 봉기와 사다 전쟁을 거쳐 2014년 수도 사나를 점령하고, 2015년 사우디 개입으로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란의 지원을 받지만 헤즈볼라식 대리인은 아닙니다. 자이디파는 이란의 12이만파와 다른 종파이고, 후티가 독자적 의사 결정 구조와 수입원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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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는 왜 여러 러시아 공국 중에서 패권을 차지하게 됐나요?
모스크바 대공국이 역로 공국 가운데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몽골과의 협력, 정교회 중심지로서 권위, 그리고 상속의 안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단합니다.모스크바는 볼가강과 오카강 사이 삼림 지대로 외세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주고, 발트해, 카스피해와 연결된 무역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설적으로 모스크바 공작들은 칸을 대신해 다른 러시아 공국들로부터 조공을 징수했으며, 그 대가로 신임과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반 1세는 이 역할을 통해 대공 칭호를 되찾고 모스크바의 부를 키웠습니다. 뿐만아니라 몽골군의 협력을 통해 트베리 등 경쟁자를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전하여 종교적 권위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는 경쟁 공국과 다르게 영지를 분할 상속하지 않고, 네세대를 거쳐 통합 유지되어 안정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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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광계토대왕릉이 발견되지 않는것은 중국이 숨기기 떄문인가요?
광개토대왕릉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태왕릉으로 추정되지만 확증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광개토대왕릉은 중국 길림성 태왕향 퉁구 분지의 우산 남쪽 기숡에 있는 태왕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주장입니다.집안은 고구려 수도였으며, 이곳에 많은 돌무지 무덤이 산재하는 데, 태왕릉도 방형 평면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다른 고분보다 규모가 큽니다. 결정적인 근거는 200미터 떨어진 지점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릉과 함께 비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일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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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친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만기친람"은 "임금이 수많은 정사를 친히 살핀다"라는 뜻의 사자성어입니다. 萬(일만 만)은 수많은, 모든의 의이미고 機(틀 기)는 국가의 중요한 정무·국정을 말하며, 親(친할 친)은 몸소, 친히, 그리고 覽(볼 람)은 살피다, 검토하다를 의미합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서경>의 고요모편에서 나왔습니다. "하루 이틀 사이에도 만 가지 일의 기틀이 싹트므로 군주는 정사를 태만히 해서는 안된다:라는 맥락이었습니다. 즉, 통치자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기리는 긍정적 표현입니다. "만기친람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는 말은 대통령이 모든 국정을 일일이 직접 챙길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만기친람이 이상적이거나 바람직한 방식이라기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통치 방식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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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겍산더 는 왜 정복지의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통치방식을 택했나요?
알렉산더 대왕은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현지 엘리트와 통혼한 것은 정당성 확보와 통치 효율이라는 목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을 정복자가 아니라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당한 후계자로 자리매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하고, 궁정 예법, 복식,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무력만으로 광대한 제국을 다스릴 수 없어 페르시아 관료제, 시트라피를 활용힌 것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청년 3만명을 마케도니아식으로 훈련하고, 수대 대혼례로 91명으로 결혼했습니다. 즉, 알렉산더의 유화적 통치는 정당성 확보, 통치 효율, 인적 자원 확충, 저항 최소화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상주의적 '문화 융합'이었는지, 아니면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 공학이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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