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에 고려는 어떻게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나요?
고려는 몽골에 항전했지만 강화 이후 왕실과 독립국가를 유지했습니다. 원은 30년간 고려의 항복을 요구했으나 끈질하게 저항하여 완전히 정복하기에는 희생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이를 위해 '불개토풍'의 원칙을 수용하여 항복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즉, 고려의 풍속을 유지하면서 왕실만 원 황실의 사위로 삼아 간접 지배하는 형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고려는 원에게 일본 원정의 전진기지이자 동쪽 변경을 방위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병합보다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효율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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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콘크리트는 왜 2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았나요?
로마는 콘크리트를 최초로 발명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만든 콘크리트는 2000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합니다. 그 이유는 화산재를 생석회와 섞어 콘크리트를 만들었는데, 이 화산재는 규소와 알루미늄 성분이 풍부하여 물과 반응하면 매우 안정적인 결합물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생석회를 고온에서 사용하면 강한 결합물을 형성한다고 합니다.게다가 콘크리트에 균열이 생겨도 빗물이나 습기가 스며들어 탄산칼슘으로 재결정되어 틈을 메워줄 수 있어 스스로 보수되는 역할을 합니다. 즉, 로마의 콘크릐트는 화산재의 특수한 광물 구성과 생석회를 고온에서 혼합, 그리고 균열이 발생하더라도 스스로 보수가 되는 메카니즘으로 오랫동안 단단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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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청룡언월도 무게가 정확히 어느 정도일까요?
<삼국지연의>에서 관우의 청룡언월도는 82근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82근은 얼마나 되는지 시기에 따라 중국의 근 단위의 정도가 달라 차이가 있습니다.후한말은 1근이 220g, 당송의 1근은 590~660g, 명청 시대도 같은 무게입니다. 그런데,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집필한 시기는 명나라 시기이지만 한나라 근을 적용하면 82근은 18kg정도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18kg를 한손으로 들고 전장에서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시기에는 없는 무기로 송나라 이후 등장하는 무기로 그 실체가 모호합니다.이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청룡언월도는 18kg 이나 후한 시대에는 없던 무기입니다. 따라서 이는 소설적 과장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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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시대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분열이 지속됐나요?
중국은 크게 세차례의 분열과 통일을 반복했는데,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 5대10국 시대는 대표적인 분열 시기입니다. 특히 후한 말기 황제의 권위가 약화, 외척과 환관의 득세로 백성이 도탄 상황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납니다. 이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위,촉,오의 삼국시대가 등장하고 진이 잠시 통일합니다. 하지만 곧바로 내부 붕괴와 흉노의 남하로 5호 16국시대의 혼란을 맞이합니다. 이후 중국은 화북의 이민족 왕조, 강남의 한족 왕조가 빈번하게 바꿔가며 589년 수가 통일할 때까지 남북조시대의 혼란 시기가 이어집니다. 위진남북조의 장기 분열은 한나라 체계 붕괴 이후 군벌·호족·이민족 세력이 난립하고 남북 모두 내부적 제약으로 압도적 통일 세력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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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은 조선 초기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조선 초기 두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조선 정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조선 건국 직후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신권 정치 구도를 구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공신과 왕족들의 사병을 억제하고,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 방석을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방석을 제거하여 왕권 강화의 기반을 다진 것입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상왕으로 물러나 사실상 정권이 이방원에게 넘어갔으며, 1400년 정종으로부터 양위받아 태종이 즉위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이 꿈꾼 신권 중심의 정치 구상은 좌절되고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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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왜 냉전 시대의 대리전으로 평가받나요?
6.25 전쟁은 냉전시대 대표적인 대리전으로 평가됩니다. 냉전기 미국과 소련은 정면으로 충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신 제 3의 국가, 세력을 지원하여 대리로 싸우는 형식으로 힘 대결을 하였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해방 이후 북위 38도를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하였으며, 각기 자신들의 체제를 지지하는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으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그런데, 6.25 전쟁이 대리전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는 1990년 이후 공개된 소련 기밀 문서 등에 따르면 김실성의 공격 요청에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도 사전에 동의한 계획 전쟁이라는 점입니다. 즉 62.5 전쟁은 냉전적 성격을 가진 국제전입니다. 강대국이 대리전을 선택한 이유는 핵 억제와 3차 대전의 우려때문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만약 정면 충돌된다면 3차 대전으로 발전할 것이고, 따라서 국지전 수준으로 관리하려 한 것입니다. 소련도 미국과 대결을 자제하고, 미국은 멕아더의 확전을 경계한 것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직접 전쟁 선언·정규군 전면 투입을 피하면서도, 각자는 동맹·위성국·지원군을 통해 전략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냉전 질서 하에서 강대국 충돌을 대신한 대리전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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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고대 문명이 실제 하나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초고대 문명은 과학적으로 인정된 문명은 아닙니다. 공시적으로 고대 문명은 매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처럼 증거가 충분히 검증한 문명만 해당횝니다. 그런데, 현대보다 앞선 초고대 문명이 빙하기 이전, 또는 수만년전에 있었다는 식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닙니다.하지만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베처럼 기존 예상과 다른 오래된 유적이 발견되면 초고대 문명의 존재를 의심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피라미드, 나스카 등에서도 과장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는 재미있는 상상과 미스터리 소재로는 좋지만 증거 기반이 미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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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왜 수원 화성을 새로 건설했나요?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조한 이유는 우선 부친 사도세자에 대한 효의 구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고, 그 주변을 보호, 기념하기 위해 화성을 축조한 것입니다. 정조는 이를 통해 통치 정당성과 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는 한성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기반으로 만든 것입니다. 정조는 직접 인재를 등용하고 권력을 재편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거점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화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남방 방어와 도시 기능을 갖춘 복합 요새입니다. 동시에 상인과 인구를 유치하여 경제 중심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즉, 정조는 화성을 통해 효,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기반, 군사 및 경제적 요충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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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왜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나요?
삼두정치를 주도했던 루비콘 강을 넘어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과 내전 승리로 압도적 군사력과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면서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어 공화주의자들의 우려를 나았습니다. 즉, 원로원은 로마의 전통인 공화정, 즉 귀족들 사이의 권력 분산을 무너진다고 느꼈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를 합법적으로 끌어내릴 방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비롯한 공화주의자들은 암살이 공화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카이사르 암살은 인기 많은 지도자를 죽인 사건이 아니라 공화정을 지키려는 귀족들이 1인 지배체제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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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분쟁과 이유를 알고 싶어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은 비슷한 코카서스 국가처럼 보이지만 종교, 민족, 지정학이 모두 달른 방향으로 발전한 나라입니다. 이런 차이가 두나라의 분쟁의 씨앗입니다. 예를 들어 아르메니아는 산악국가이며, 기독교, 디아스포라가 강한 나라입니다. 아제르바이젠은 석유와 천연가스와 같은 에너지 자원이 풍부하고, 튀르크계 이슬람 문화, 그리고 카스피해와 맟닿아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합니다.특히 두 나라는 1988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놓고 충돌했습니다. 이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되지만 주민 대다수가 아르메니아인입니다. 소련 붕괴 후 아르메니아계는 아르메니아 귀속, 독립을 주장했고,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영토 고수를 내세우며 충돌하였습니다. 2020년 전쟁과 2023년 군사작전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지역의 실효 지배권을 회복했고,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대거 탈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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