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마지막 황제 자금성의 주인 푸이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요?
푸이는 1906년에 태어나 1908년의 두살 나이에 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실권은 황실과 대신들에게 있었습니다.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지면서 푸이는 위안스카이에 의해 1912년 퇴위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황실에 대한 우대 조건에 따라 자금성 안에서 황제 칭호와 궁중 생활을 한동안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1924년 군벌 펑위샹이 베이징을 장악하면서 푸이는 자금성에서 쫒겨났습니다. 이후 일본 조계지인 텐진으로 옮겨가 일본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일본이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1932년 만죽국을 세웠는데, 푸이를 국가의 상징으로 세운 것입니다. 푸이는 처음에는 만주국의 집정이 되었고, 1934년 강덕제 이름의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군사, 외교, 경제의 핵심은 일본이 차지하고 있어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보호를 이용하여 중국 전체의 황제가 되고자 했으나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는 처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차 대전이 종결되고 나서 만주국도 무너졌습니다. 푸이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에서 5년간 포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중국으로 넘겨져 전범 수용되었으며, 전쟁 당시의 책임과 일본에 협조한 경위에 대한 조사와 사상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59년 사면된 후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 중국 과학원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으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도 지냈습니다. 푸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불안을 겪다가 1967년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61세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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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제국이 160명 남짓의 스페인 군대에 무너진 이유는?
잉카 제국이 160여명의 스페인군에게 무너졌던 것은 우선 잉카제국 내부의 분란입니다. 잉카에서는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천연두로 사망한 뒤 두 아들 아타우알파와 우아스카르가 왕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으로 제국의 군대와 행정력이 약화되어 분열된 것입니다. 1532년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아타우알파를 기습해 사로잡자 잉카 제국은 지휘력을 잃었습니다. 스페인은 막대한 몸갑을 받고도 오히려 아타우알파를 처형하였습니다.스페인군은 수적으로 적었지만 철제 무기, 총, 기병을 이용하여 잉카군에서 위협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천연두 같은 전염병은 잉카인들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결국 잉카 제국은 소수 스페인군이지만 내분과 스페인군의 첨단 무기, 그리고 전염병 등에 의해 무너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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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왜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해야 했나요?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전개된 포에니 전쟁은 로마가 이탈리이 반도를 넘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3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여 더이상 재기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는 군사력과 영토를 크게 잃고 로마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금새 카르타고는 회복했으며, 로마를 불안케 하였습니다.전쟁의 직접적인 명분은 카르타고가 로마의 허락없이 누미디아 왕과 전쟁을 벌였으며, 이를 구실로 로마는 카르타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내부에서도 반카르타고 여론이가 강했습니다. 또한 카르타고의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려는 경제적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로마가 3차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한 이유는 카르타고의 군사적 위협과 로마에 대한 위협, 그리고 원로원의 정치 선동과 북아프리카 지배 욕방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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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알려진 중국의 관광지 말고 여기는 꼭 가봐야
중국은 광대한 영토와 유구한 역사로 자연 경관과 문화재가 산재합니다. 따라서 베이징, 상하이, 시안, 장가계 등의 알려진 유명한 곳 이외에도 덜 알려졌으나 어느곳과 비교해도 못지않은 곳도 많습니다.예를 들어 후이저우 고성(안후이성)은 명청시대 상인들의 전통 가옥과 사당, 골목이 잘 남아 있습니다. 흰벽과 검은 기와의 '휘파 건축'을 보기 좋아 색다른 여행이 될 것입니다. 또한 타이위안 진사(산시성)은 북송 이전부터 이어진 사당과 고대 정원, 목조 건축을 볼 수 있는데, 중국 고대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합니다. 그리고 명나라 시대 성벽과 옛 시가지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린하이 고성(저장성)도 가볼만 합니다. 핑야오보다 덜 붐비면서도 성곽과 전통 거리를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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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등 역사적 권력자 들의 무덤의 위치는 지금도 찾을 방법이 없는 걸까요?
칭기즈칸이 1227년 사망 뒤 비석이나 눈에 띄는 시설 없이 비밀리에 매장하였습니다. 무덤을 숨긴 이유는 정복자의 시신과 부장품을 도굴로부터 보호하고 사후에도 신성한 존재로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장례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말로 흔적을 지웠다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도 정확한 위치를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유력 후보로 몽골의 부르칸칼둔산 일대와 중국,닝샤의 류판산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위성사진, 드론, 지표투과레이더, 고고학 조사 등의 첨단 과학 기술의 활용이 가능하여 후보지를 축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적이 발견되더라도 유골이나 유물이 칭기즈칸의 것임을 입증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몽골 정부와 주민들이 성역을 보호하기 위해 발굴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도 난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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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거북선 이전에도 유명한 배가 있었는지요?
조선시대의 주력 함선은 판옥선입니다. 판옥선 2층 구조로 아래층은 노를 젓는 수군이, 위층에는 화포를 쏘도록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판옥선 높은 선체로 적들이 배에 오르기 어려워 백병전에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평평한 바닥은 얕은 연안에서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방향을 빠르게 변경할 수 있습니다. 거북선도 사실은 판옥선을 바탕으로 개량하여 만든 돌격전함입니다. 판옥선 위에 덮개를 씌우고 적들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칼과 송곳을 설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용머리에 포문을 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거북선은 조선 초기 태종 때 귀선이라는 이름의 배가 기록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은 이전부터 건조된 귀선, 판옥선 기술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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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핵투하를 했는데 일본은 미국이 핵무기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었나요?
일본은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완성되었는지, 그리고 파괴 위력을 알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따라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어었을 때 핵무기 아닌 또다른 재래식 무기인 것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사단과 미국의 발표를 통해 원자폭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군부 강경파의 반대로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하고 만주를 침공하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자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8월 15일 천황이 항복을 발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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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나라는 국호가 바뀐적이 없이 똑같았는지요?
고대 일본은 '왜', '왜국'이라 불렀습니다. 일본 열도에서는 야마토라는 명칭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스카 시대의 7세기 후반부터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70년에는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기록도 전합니다.그리고 우리나라, 중국 기록에서도 점차 일본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왜', '왜국'이라고 계속 부르며 낮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통치 주체가 바뀌어도 명목상 천황 가문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유지하여 내려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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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들도 휴가기간이라는 개념이 있었나요?
조선시대 국왕들은 오늘날과 같은 휴가 개념은 없었습니다. 왕들은 국정을 보살펴야 하므로 일년내내 정무를 보았습니다. 다만 국왕도 명절이나 국가 행사 때 정무를 줄이고, 사냥이나 온천을 갈때는 휴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승이나 고위 관료 신하가 사망하면 며칠간 공식 업무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거도 단순한 휴가라기보다는 건강 관리나 제사, 군사 훈련을 일정인 경우입니다.반면 신하들은 관리들엑 순휴일이라 하여 정기 휴일이 있어 열흘에 한번씩 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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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에 전래된 기독교는 왜 이후 금지되고 박해받게 됐나요?
전국시대 처음 일본에서 기독교는 환영받았습니다. 하지만 통일 진행되면서 기독교는 정치적 위협이 되었습니다. 당시 다이묘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상인들과 교역하고, 조총을 얻기 위해 선교사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와 기독교 개종 다이묘들이 외국세력과 연결하여 일본에 침략하거나 개입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 세력이 불교 사찰을 파괴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1578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신자와 선교사 26명을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에도 막부 시대에도 기독교 신자들이 주군보다 종교적 지도자에 충성할 것을 우려하여 1614년 금교령을 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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