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는 출세의 중요한 길인데, 가장 어린 나이와 가장 늦은 나이로 합격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조선에서 과거는 관료 진출의 최선의 길이며, 과거에 급제해야 고위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생들은 평생을 과거 급제를 위해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로 급제한 인물은 고종 13년(1866) 이건창으로 13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했습니다.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려 4년 1세에 이르러서야 승정원주서(7품) 직에 벼슬을 받았습니다.그리고 최고령으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은 고종 24년(1887)에 박문규입니다. 그는 83세의 나이로 개성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했습니다. 고종이 특명으로 병조참지(정3품 당상관)에 제수되어 초고속 승진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얼마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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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가무아문은 어떻게 운용되었는가요?
1880년 12월 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통리기무아문의 수장은 총리 대신으로 영의정, 좌의정 등 정부 대신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당상과 낭청 참사 등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업무를 12사로 분담하여 각기 개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2사로는 사대사, 교린사, 군무사, 변정사, 통상사, 군물사, 기계사, 선함사, 기연사, 어학사, 전선사, 이용사로 구성되었습니다.하지만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 계기로 페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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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외국 상인들이 조계지를 중심으로 상행위는 어떻게 규정되었나요?
개항 이후 조선은 내지 전역에 걸쳐 상권을 개방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876년 8월 조일수호조규부록에 의해 일본 상인들은 조계지(거류지)에서 10리(4km) 이내에서만 상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 상인들은 면직물 등 공산품을 조계 내에서 중간상인들에게 넘기고, 중간 상인들이 장시에서 쌀, 콩 등을 수집하여 일본 상인들에게 되팔아 이익을 남겼습니다. 즉, 개항 초기 외국상인들은 조계지(개항장, 거류지)의 10리 이내에서만 무역, 상해위를 했으며, 객주, 보부상 등 중간 상인들의 중개를 통해 거래했습니다. 하지만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청나라 상인들이 내지 무역이 가능해지자 일본 상인들도 내지까지 왕래하면서 상행위를 할 수 있어 상권 침탈이 심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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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향약과 동약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향약은 조선 중기부터 향촌의 자치 규약으로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4대 강목을 바탕으로 유교적 덕목을 향촌에 보급하여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양반 사족이 운영 주체이고, 군현 단위로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향약은 향촌의 양반 사족들이 향촌을 통제하고, 백성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양반의 증가로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가 약화되면서 양반 사족들은 향약을 통한 향촌 지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양반 사족들은 동리 단위(촌락) 단위로 소규모로 규약을 만들어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동약을 만들었습니다. 동약은 상하민 통합과 공동 작업과 협동, 길흉사 협조 등 상부상조의 촌락의 자치 규약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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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코끼리 관련 기사가 있는데, 어떤 게기로 기술된 것인가요?
조선시대 코끼리 기사 내용은 태종(1411) 당시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먹성이 너무 커 하루에 콩 4~5두를 먹어 유지비가 매우 비싸다는 것과 두사람을 해치고 한사람을 밟아 죽여 전라도 장도에 귀양를 보냈다고 합니다. 전라도 순천부 장도(여수)에서 10년간 생활했는데, 수초를 먹지 않아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유배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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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재소는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와 무엇이 다른가요?
고려 태조 왕건이 호족 세력은 견제 및 융합하기 위해 사심관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 관료를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되, 해당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사심관에 연대 책임을 물리는 제도입니다. 즉, 사심관 제도는 지방 호족에 대한 우대와 견제를 동시에 반영한 것입니다. 반면 조선시대 경재소는 조선 건국 초기에 사심관 제도를 대신하여 시행된 것으로 지방 출신 재경 관료로 임원을 구성하여 각 지방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 지역의 기강을 잡으려는 제도입니다. 경재소 임원은 그 지역의 유향소 품관을 임명하고 감독할 수 있으며, 출신 지역과 정부와의 중간에서 연락 기능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수령권 강화를 위해 페지하였습니다.경재소는 사심관 제도의 분화 발전한 것으로 중앙 집권화 강화와 지방 사족에 대한 통제와 연락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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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왜 호족 연합 정권으로 시작했다고 평가받나요?
신라말 중앙의 진골 귀족이 왕위 쟁탈전을 벌이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권의 약화로 호족이 성장했습니다. 호족 세력은 후삼국 시대로 이어졌으며,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호족들의 협력을 통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태조 왕건도 송악의 호족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그도 스스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세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호족들은 각자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통일 전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호족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태조 왕건은 통일 직후 호족 우대를 통해 왕건을 안정시킨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왕건은 29명의 호족의 딸과 혼인 관게를 맺었으며, 관직 수여와 사성을 시행했습니다. 즉, 고려는 외형적으로는 중앙집권처럼 보였으나 내용적으로 호족들의 협력을 통해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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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록은 있는데 왜 이전에 고려시대나 고구려,백제,신라 이때의 기록은 거의 없는건지 궁금합니다!!!
고려시대에도 실록이 편찬된 적이 있습니다. 고려 초기 왕조 실록이 편찬되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실된 실록을 복원하기 위해 1013년(현종 4년)에 다시 태조때부터 목종까지 7대 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1034년 36권으로 완성되하였습니다.7대 실록 이후에도 계속 편찬되어 고려말까지 185책의 고려 왕조 실록을 편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춘추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조선시대 초기 발행된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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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이후 유럽에서는 왜 의학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나요?
흑사병 유행은 유럽의 의학 발달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 로마 의학에 기반한 체액설과 신앙 치료의 실패를 보여주웠습니다. 게다가 기도, 순례, 성유물 등 종교적 방법도 소용없자 교회의 권위도 떨어졌습니다. 대신 흑사병이 사람 간 전파된 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전염병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었으며, 격리 제도 도입, 위생 개념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역, 검역, 위생 규제 등 공중 보건그리고 흑사병으로 인한 대량 사망으로 해부학 연구가 활발해졌습니다. 의사들은 인체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며 과학적 의학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르네상스와 근대 의학으로의 전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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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3분의 1가량을 소멸시켰다는 사실이 이후 봉건제 붕괴와 임금 상승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요?
14세기 유럽 전역에 흑사병으로 전체 인구의 1/4~1/3 인구가 줄어들 정도로 영향력이 큰 팬더믹이었습니다. 인구의 급감은 노동력의 부족 현상을 일으켰으며, 영주들은 농민들을 붙들기 위해 화폐지대, 생산물 지대 등 더 나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급기야 농노를 해방하여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봉건제는 농노의 부역 노동을 바탕으로 운영된 장원 경제 체제였으나 흑사병의 유행으로 인구가 줄어들자 장원제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즉, 봉건제를 받치고 있던 주종제도와 장원제도 가운데 장원제의 붕괴는 중세 봉건제 체제를 붕괴를 야기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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