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초기에 나타난 왕위관련한 왕족 친인척들간의 싸움이 없었던건가요?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초기와 같이 왕권을 둘러싼 왕족 친인척 간의 유혈 충돌과 같은 무력 쿠데타 양상의 왕위 쟁탈전은 크게 즐어듭니다. 하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초기 왕자의 난, 계유정난으로 무력 충돌이 빈번했으며, 중기로 갈수록 왕권이 약화되고, 신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직접적인 왕족간의 유혈 충돌보다는 신료와 외척의 협력 또는 암투, 붕당간의 정쟁을 통한 간접적 권력 이동이 주류로 자리잡게 됩니다선조 당시 광해군의 세자 챙복 문제로 갈등잉 있었으나 정식 무력 쿠데타로 발전하는 일은 점차 드물어 졌습니다. 이는 왕위 계승 원칙이 점진적 안정,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등이 원인입니다.
Q.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관계는 어떠하였으며 왜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에게 밀린건가요?
안평대군도 수양대군 못지 않게 야심찬 인물였습니다. 안평대군은 조선 초 문화계의 거목으로 문사와 관료. 예술가들과 폭넓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두 형제는 학문과 예술적 소양에서 가까운 사이였으나 단종의 어린 나이 즉위후 정치적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수양대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수양대군이 평소 관료와 군사를 포섭해 실질적으로 무력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계유정난 이후 실권을 잡아서입니다. 반면 네트워크를 가졌으나, 실제 정치적 조직력이나 군사력은 수양대군에 비해 약했고, 김종서 중심 의정부 체제에 기대어 있었기에 단호한 집행력에서 밀렸습니다.
Q. 일제강점기 조선의 저항운동은 구체적으로 뭐가 있나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은 다양한 계층,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3.1운동 이후 1920년 이후 국외 무장투쟁 이외에도 의열투쟁, 외교투쟁, 실력양성운동, 농촌계몽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소년운동, 종교운동, 형평운동, 여성운동 등이 전개되엇습니다.예를 들어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학업을 거부하는 동맹휴학을 벌여 식민지 교육, 차별, 부당한 교칙 등 항의하였습니다. 특히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항일 운동을 학생들이 주도한 대표적인 항일 민족운동입니다.종교계에서는 개신교의 신사참배거부운동, 한용운 선생님 주도하는 사찰령 폐지 등 저항운동, 천도교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Q. 고대 인더스 문자는 어느 정도까지 해독이 되었나요
인더스 문명의 상형문자는 현재까지 해독되지 못했습니다. 해독이 까다로운 이유는 우선 사례가 적고 길거나 긴 문헌이 없으며, 도장, 도자기, 청동 제품 등 일부에만 존재합니다. 문자 체계가 독특하고 알려진 어떤 언어와도 연관성이 없어 해독이 어렵습니다. 또한 인더스 문자가 어떤 언어를 표기하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며, 산스크리트어나 드라비다어 등 여러 가설이 있으나 확정적 증거는 없습니다.
Q. 서양 전설 속의 장소인 아틸란티스는 존재할까요?
아틀란티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기술한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서 처음 언급했습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약 9000년전 대서양 어딘가에 존재했던 고도로 발전한 해양 문명으로 묘사했습니다.그런데 아테나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갑작스러운 자연재해로 하루아침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플라톤의 철학적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대 문헌에서는 플라톤 외에 아틀란티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며,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학설과 탐험이 있었지만, 실제 존재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기에, 아틀란티스는 신화나 전설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Q. 카르타고는 어떻게 건국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 페니키아 출신 사람들이 북아프리카 현재의 튀니지에 세운 도시국가입니다. 설립 설화에 따르면, 티레의 공주 디도(Dido, 엘리사)가 가족 내 권력 투쟁을 피해 동료들과 이주해 카르타고를 건국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카르타고는 초기에 페니키아 모도시의 정치·종교적 영향을 받는 식민지였습니다. 초기 타레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본토 페니키아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침략으로 쇠퇴하자 점차 독립성을 키워 기원전 650년 실질적으로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Q. 카르타고와 당시 페니키아의 관계는 무엇이었나요
카르타고는 페니키아가 세운 대표적인 식민도시 국가입니다. 오히려 본국인 페니키아보다 더 발전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카르타와 페니키아인들은 모두 지중해 상업을 장악했습니다. 두 세력은 자색 염료, 값비싼 직물, 금은동철, 귀금속, 곡물, 올리브, 왕인 등을 교환하였습니다. 페니키아 본토가 점차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오리엔트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쇠퇴하자, 카르타고는 기원전 650년경 실질적인 독립세력이 됩니다. 이후 서지중해 일대 페니키아계 식민지들(우티카, 가디스, 사르데냐, 몰타 등) 상대에도 패권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페니키아 문화권의 중심이 카르타고로 넘어가게 됩니다.최기에는 모도시-식ㅁ니지 체계였으나 카르타고의 독립과 팽창 이후 서지중해 상업권을 놓고 경재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와 맞설 때는 연합 대항축을 유지했습니다.
Q. 카르타고의 해상교역네트워와 주요 교역상품이 무엇인가요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을 중심으로 서지중해의 주요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해상로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몰타, 남부 이탈리아 등에 교역하였습니다.사하라 사막을 넘는 내륙 무역로를 통해 들어온 금, 상아, 동물, 노예를 들여왔으며, 영국, 서아프리카와 연결하고 이집트, 그리스와 교류했습니다.카르타고는 수공예품, 귀금속, 곡물 등을 교역하여 부와 세력을 화가장했습니다.
Q. 카르타고 전함의 설계·선원 구성과 해전 운용법은 어떻게 되나요?
가장 대표적인 전함은 퀸커리메였습니다. 이외에도 트리레메, 콰드리레메, 드물게 그 이상인 큰 선박도 운영하였습니다. 주로 오크, 소나무, 전나무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선체는 날렵하고 길게 설계되어 빠른 항해와 기동성에 초점을 두었으며, 선체 외피에는 납이나 수지로 방해 생물을 막는 처리도 했습니다. 대규모 생산에 적합하도록 각 부품별로 번호를 세겨 조립식으로 제작했습니다. 퀸커리메의 크기는 약 37~45미터, 폭은 5~6미터 내외로 추정합니다. 승선인원은 100~120명의 무장 병사를 태울 수 있었을 것을 추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