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제사는 유교문화이고49제는 불교문화라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의 제사 문화는 원시·고대인들이 자연 그 자체를 대상으로 외경심, 신비감의 근원인 신, 하늘, 땅 등에 대해 삶의 안식과 안락을 기원하거나 감사의 표현으로 제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인간의 사후 영혼에 대한 신앙도 생겨나게 되어 조상신에 대해서도 숭배와 복을 비는 제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제의는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제도로 정착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단군 이전부터 하늘의 자손으로서 제천의식을 하였고, 나아가서는 단군을 섬기는 제사나 자연의 일부(토템-산, 바다, 나무 등)를 섬기는 제사를 지내곤 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지내고 있는 조상 제사의 형태는 조선 시대에 들어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제도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국가, 왕가, 일반사가의 모두 주희의 『가례』를 기본으로 삼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유교의 제사는 효의 한 방법으로서 조상의 추모와 복을 바라는 것이 섞여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하는 재는 유교의 제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한자 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부터 신께 올리는 것이나 유교적 전통 방식으로 조상에게 올리는 것은 제(祭)라고 하고, 불교에서 하는 것은 재(齋)라고 합니다. 원래 재는 부처가 하루 한번 하는 사시공양을 가리키던 말로 이후에 법문을 설법하였기에 법회로 발전하였고, 이후 불교 의식인 재로 불리었습니다 불교의 재는 조상신을 기리는 제사가 아니라 그 영혼이 이승의 연을 뒤로 하고 사후 세계로 돌아가 다시금 윤회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의식을 치르는 것입니다. 에는 귀신에게 제사 지내지 말라는 부처의 말씀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새로운 세계에 바로 태어나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을 '중유'라 하며 사람이 죽으면 7일 단위로 머무르고 7일 한도로 인연을 못 얻으면 죽었다가 다시 나서 7일을 머문다고 합니다. 이로써 총 49일을 머무르는 것을 중유라고 합니다. 이 기간에 인연을 받아야 중유 종자가 바뀌어서 소속되어 있는 원래의 곳에 다시 태어나거나 또 다른 종류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망자는 필히 윤회를 하는데 현생에서 업보에 따라 지옥세계, 아귀세계, 축생세계, 아수라세계, 인간세계, 하늘세계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망자는 현생에서 행한 행위에 대해 7명의 재판관에게 재판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어느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른바 삼악도(三惡道; 지옥도·아귀도·축생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재판관들에게 드리는 기도행위가 바로 49재입니다.저승의 각 재판관들은 진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성대왕의 순서로 7일씩 망자를 재판합니다. 유가족들은 이러한 49일 동안 7번의 제사를 지냅니다. 보통 7일 마다 올리는 재는 간소하게 하고 마지막 49일이 되는 일곱 번째 재는 정성이 가득 담긴 재물을 드립니다. 49재순서는 1.시련(侍輦:영가를 초청해 영단에 모심) 2.대령(對靈:영가에게 진행할 일을 부처님의 법으로 한다는 것을 설명함) 3.관욕(觀浴:업장소멸과 부처님의 정법이 무엇인지설명하는 일종의 영가 목욕시키는 것) 4.헌공(獻供:부처님게 공양을 드리는 의식) 5.신중헌공(神衆獻供:천지신명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 6.천도재 (이 천도재를 제사와 유사한 의미로 여기기도 함)7.봉송(奉送:영가를 환송) 8.탈상(脫喪:상주가 평상으로 돌아가는 의식)으로 종료된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49제라는 말은 없고, 49재라고 합니다. 유교의 제례 문화와 불교의 49재 장례의식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유교의 제례 문화에서는 위패에 지방을 쓰는데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부친의 제사를 올릴 때 쓰는데 이때 쓰는 '신위'라는 것은 돌아가신 부친의 영혼을 부르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교의 제사는 조상신을 불러서 하는 것이고, 불교의 재, 즉 49재는 장례의식으로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서 윤회할 수 있도록 하는 기도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요즘 절에서는 불교 신도 중 집에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절에 위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오랜 유교적 사상으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효라는 의식이 강하다 보니 불교도인 경우에도 그 날을 기리기 위해 절에 위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조상의 제사를 대신 지내주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기일에 불교적 재를 올리는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천주교에서 부모님 기일에 미사를 넣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교의 제사와 불교의 49재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조선시대 왕의 딸로 태어나면 붙여주는 칭호가 공주 옹주 이렇게있는데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실부인 즉 중전에게서 낳은 아들은 대군, 딸은 공주라 부르고,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은 군, 딸은 옹주라고 부릅니다.부름에 있어서 차이는 있었으나, 후계로 낙점된 세자가 아니고서는 대우는 동일하다고 보면 됩니다. 공주와 옹주는 권력 서열과는 상관없고 구분 없이 부마라고 지칭했다고 합니다.
Q. 홍범도 장군이 잘못한 부분도 있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시는 바와 같이 홍범도 장군은 일제 식민시대에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입니다.최근 흉상 이전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육사에서 이전해여 독립기념관으로 옮기는 것을 검토 중이라는 것으로 보아 독립유공자임에는 이견이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가 1927년 소련 볼셰비키 공산당원이었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국가관 확립을 교육 목표로 하는 육군사관학교에 흉상이 있다는 것에 문제 제기가 되어왔던 것 같습니다.당시에는 일제 치하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국민들 중 지식인들이 조국의 독립 운동을 위해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활용하였기에 해방 이전에 그러한 사상을 가진 독립유공자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방 이후 6.25 전쟁 전까지 공산주의자였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6.25 전쟁에 공산주의 쪽 편에 서서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을 침략하는데 일조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그러한 활동을 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사망하였기에 거기에 관계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다만 홍범도 장군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측은 자유시 참변에 그가 관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자유시 참변이란 1921년 만주 일대를 근거지로 하던 독립군부대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을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게 됩니다. 전체 규모는 2천여명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소련 공산당이 무기 등을 지원한다고 의심한 일본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러시아에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같은 해 6월에 러시아는 독립군에 무장해제를 명령하자 독립군은 저항하자 사살 또는 포로도 체포하는 참변이 일어나게 됩니다.그런데 소련이 일본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 내면에 독립군 내부의 분열 및 이해 관계가 얽혀있었다는 문제가 붉어져 나오게 됩니다. 독립군 부대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지휘권에 대한 싸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극동공확국 인민혁명군은 소련 내전 때 소련 측에서 만들었던 조직입니다. 독립군 부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여 사라졌고, 남아있는 포로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그에 따른 처벌을 받게 됩니다.홍범도 장군이 그 자유시 참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가 몰살하다시피한 독립군 부대 쪽이 아닌 혁명군 편에 섰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고 보는 쪽도 있습니다.그 이유는 그가 자유시 참변 후1. 포로들의 재판에 군사재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는 점2. 연해주에 거주하면서 레닌으로 부터 혁명정권 협조에 감사하다며, 금전적 지원과 권총을 하사 받은 점3. 그 이후 1927년에 볼세비키 당에 입당하여 소련군 대위로 편입되고, 조선인여단 지휘관으로 승진하고, 휘하의 독립군 병력 300여명을 소련군으로 편입시킨 점4. 자유시 참변 생존자인 사할린부대 출신의 김창수, 김오남이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물어 홍범도 장군을 죽이려고 했을 때 레닌에게 받은 총으로 그들을 사살했는데, 이후 감옥에 갇힌 후 레닌의 증명서로 석방된 점등 여러 이유로 인해 혜택을 받았으니 자유시 참변에 독립군 부대를 공격하여 사살하는데 일조했다는 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하지만 그러한 근거는 없다고 보이고 비난하는 측에서 정황상 추측하는 것이라 보이며, 6.25전쟁 훨씬 전에 사망하였기에 독립운동 외에 현 대한민국에 위해를 가한 행적은 없다고 판단됩니다.
Q. 발해의 건국과정과 멸망이유는 무엇인지 질문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의 정식 명칭은 대진국입니다. 당시 중원의 당나라가 자신들이 황제국가로 제후국인 것처럼 인정하여 대중상은 진국공, 걸사비우를 허국공이라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고,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였고, 당과 대치하다가 사망하였고, 대중상도 얼마 후 사망하고, 대조영이 황위에 오르자 당에서는그것을 또 격하하여 발해군왕에 봉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사서를 기준으로 발해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 전에는 일본 등 주변국에서는 여전히 고려라고 불리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진국 발해는 황제국으로 전승한 고구려 이상으로 맹위를 떨친 강국으로 해동성국이라 불리었습니다. 대진국 발해는 고구려계와 말갈계를 대표적으로 하여 다민족 국가로서 고구려계였던 대중상, 대조영, 말갈계의 걸사비우를 주축으로 하여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딱 30년 후인 698년에 건국되었고, 926년에 거란의 침공과 내분으로 인해 멸망하였다고 합니다. 멸망의 시점은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발해 멸망 후 바로 그 유민들이 후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판단되어집니다. 그 이유는 책부원귀, 오대회요, 구오대사, 오대사기, 속자치통감 등의 중국 사서에 발해 멸망 3년 뒤인 929년 5월 발해에서 고정사라는 사신을 파견하는 기록도 나오고, 929년 7월 19일 그 고정사를 태자 세마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 934년 발해 태자 대광현이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귀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 기록에는 발해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고, 같은 대씨 성의 왕과 태자에 대한 기록에서 정안국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발해라는 국호가 정안국으로 내부적인 이유에 의해 바뀌지 않았나 판단됩니다. 200년 이상 지속된 강국이었습니다. 991년 기록에서도 왕자인 대원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왕권을 발해 왕족인 대씨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고려시대,조선시대 사람들은 양치를 어떻게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치질의 어원을 살펴보면 '양치養齒'는 버드나무 가지를 뜻하는 '양지楊枝'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해 이를 세정하는 행위를 양치질이라고 했습니다.고려시대의 에서는 치아 사이를 청소하는 방법으로 버드나무 가지 끝을 으깨어 그 갈라진 것으로 이와 이 사이를 쓸어내듯 하면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에 소금으로 이를 닦고 따뜻한 물로 헹구어내면 이에 남은 술독이 제거된다는 이야기가 있고, 굵은 소금을 입에 넣고 손가락을 이용하여 닦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금을 이용하는 방법은 당시 소금이 비쌌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활용하기가 어려워 쑥이나 지푸라기를 이용했다고 하고, 쑥을 달인 물로 입안을 헹구어내던가, 지푸라기로 이에 묻은 지꺼기 등을 닦아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