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인천광역 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에 있는데요.
인천 송도는 일제강점기에 붙은 일본식 지명입니다. 송도의 옛지명은 원래 옥련이었고, 한나루 옹암 같은 이름도 사용했습니다. 1936년 10월 인천부가 부천군 문학면 일부를 편입하여 송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1937년 7월 일제가 이곳을 송도유원지나 송도정을 개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리잡습니다.송도는 일본 3대 명승지 마쓰시마의 이름을 따왔다거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해군 군함 마쓰시마호에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1946년 광복 직후 원래 이름인 옥련동으로 환원되었다가 1990년대 이후 송도신도시 개발이 추진되면서 '송도'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국제 브랜드화, 오랫동안 사용한 관행, 주민 정착과 행정 비용, 행정적 검토 지연에 비롯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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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죄수복은 왜 그토록 눈에 띄는 흑백 가로줄 무늬로 만들어졌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탈옥 방지였습니다. 흑색의 강한 대비는 멀리서도 죄수를 식별하기 쉽고, 야외 작업이나 행렬을 할 때 감시에 유리합니다. 줄무늬를 선택한 것은 염색도 유리했습니다. 줄무늬 옷은 염색을 해도 무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줄무늬 죄수복은 "수치의 표식" 이었습니다. 모든 죄수에게 같은 옷을 입혀 개성을 지우고 동일한 번호로 환원했습니다. 가로줄 무늬는 착시 효과로 착용자를 더 넓게 보여 덜 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줄무늬 죄수의 표시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중반 십자군 원정 이후 파리에 온 가르멜회 수도자들이 줄무늬 망토를 입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자 성직자들이 이를 금지한 것이 시작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후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사람에게 줄무늬 옷을 강제로 입혀 일반 시민과 구분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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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 귀족들은 왜 씻지도 않으면서 얼굴에 독성 납 가루를 발랐을까요?
18세기 귀족들이 목욕을 피한 이유는 체액설에 기반한 '닫힌 몸' 이론 때문입니다. 당시 의사들은 물이 피부의 뼈구멍을 열어 질병이 몸속으로 침투한다고 믿었습니다. 물이 몸을 물러지게 만들어 공기중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시킨다는 것입니다. 즉 목욕 자체가 건강을 해친다고 보는 것입니다.여기에 공중 목욕탕이 매춘과 성병의 온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남녀가 함께 목욕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했습니다. 헨리 8세는 런던의 목욕탕을 평판이 나쁘다는 이유로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납 가루를 칠하는 것은 창백한 피부였습니다. 야외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계층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산화납 혼합물이 베네치아 세루즈를 발랐습니다. 하지만 납이 피부를 상하게 해 흉터가 생기면 더 많은 납으로 덮었고, 축적되면 빈혈, 마비,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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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범죄조직이 있었나요?
조선시대에는 '무뢰배', '화적', '검계'라고 하여 도적, 또는 범죄 조직이 있었습니다. 명화적, 줄여서 화적입니다. 이들은 일반 강도와 다르게 수괴가 있으며, 부유한 가정을 골라 공격하였습니다. 규모에 따라 20~40명이 한부대를 이루고 활, 칼 등으로 무장했습니다. 그리고 검계라는 조직도 있는데, 비밀결사 형태의 전국구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살인과 약탈을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무뢰배는 부유·부랑 집단으로, 무기를 소지한 채 민가를 침탈하고 유부녀를 납치·겁탈하거나 재산을 빼앗는 행패를 일삼았습니다. 이들은 유민의 한 부류에 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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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히피들은 왜 마약에 호의적이었나요?
히피들이 마약에 호의적인 이유는 그들의 반문화 운동에서 기성 사회를 거부하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히피는 1960년대 급격한 도시화와 물질주의에 대한 소외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에서 출발한 반문화 운동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정상적인 것은 기성 세대가 강요하는 이데올르기이자 자유를 억압하는 허구로 여겼습니다. 즉, 마약은 단순히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주류 사회의 규범을 거부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동양 신비주의 명상과 연결해 의식 확장의 수단으로 인식했으며, 환각제 경험이 히피의 성례전이자 상징적 중시으로 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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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일본을 장악할 수 있었나요?
히데요시는 미천한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시대의 혼란 상황, 오다노부나가의 능력주의, 개인의 재능과 기회 포착에 의한 것입니다. 특히 주군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스히데에게 죽자 주고쿠 대회군으로 되돌아와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스히데를 격파하였으며, 주군의 원수를 갚아 오다 가문의 장군으로부터 히데요시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천한 출신이지만 후지와라 감누 양자로 입적해 1585년 간파쿠에 취임하여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 성씨를 하사 받아 혈통 장벽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오다와라 정벌로 전국을 통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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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왜 오랫동안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나요?
1623년 인조 반정 이후 서인은 오랫동안 정국을 주도했습니다. 서인은 인조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반정 직후 숙청과 등용을 병행해 반정 세력 내부의 결속력을 높였고, 서인 핵심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반정공신 책봉과 논공행상이 이들의 권력 기반이 되었습니다. 특히 서인은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특히 왕권 수호를 명분으로 호위청을 설치해 호위군관을 공병화했고, 반정에 공로가 큰 4대장 2당상관은 사모군을 공병화해 이를 기반으로 정국을 주도했습니다. 비록 남인의 진출을 허용하여 공존 체제를 보여주었으나 남인에 대한 견제 구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 구도는 인조, 효종, 현종때까지 이어지다 현종의 2차 예송논쟁 이후 잠시 남인이 집권을 거쳐 숙종 때에 들어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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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나 삼국시대에 야간 통행금지는 있었나요?
조선시대에는 분명히 야간 통행 금지가 있었으며, 삼국시대에도 시보제를 통해 야간 통제를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조선의 야간 통제는 야금이라 불리고, 인정에 시작해 파루에 풀렸습니다. <경국대전>에도 문개폐조는 "도성문은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연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기면 경수소에 구금되고 이튿날 곤장 10~30대를 맞았습니다. 특정한 날에 통금ㅇ르 풀었는데, 이를 방야라 합니다. 정월 대보름, 초파일, 섣달 그뭄, 동지, 왕의 생일과 능행, 과거 시험, 연회 등입니다. 조선의 야금은 1895년 인정과 파루 제도가 페지되면서 사라집니다.삼국시대에는 시보제가 있었는데, 신라의 경우 북과 종으로 도성에 시각을 알렸고, 이를 통해 궁문과 성문의 개폐 시각과 관료들의 출퇴근을 규제했습니다. 다만 야금처럼 야간 통행 금지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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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우왕은 이성계란 인물에 대해서 견제를 많이 했었나요?
1388년 최영과 이성계는 우왕의 지지를 받아 임견미, 염흥방, 이인임 등 권문세족을 제거했습니다. 당시 이성계는 우왕을 지키는 신흥 무장이었습니다. 즉, 처음에는 이성계는 우왕의 경계 대상은 아니었습니다.하지만 1388년 요동정벌을 계기로 우왕은 이성계를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내세워 반발했습니다. 그런데 우왕은 이성계의 반대 의사를 묵살하고 추진한 것입니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 등 친명파를 제거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근거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해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했습니다. 우왕은 1389년 김저와 모의해 이성계 제거를 시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그해 처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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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후손들을 지금도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자료가 있나요?
동학농민혁명의 후손은 지금도 공식 제도로 특정할 수 있습니다.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사위원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유족 등록 대상은 참여자의 자녀, 손자녀, 증손자녀, 고손자녀이며, 외가 쪽도 포함됩니다. 참여자로 인정되는 범위는 1,2차 봉기에 실제 참여한 사람, 물자나 정보,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 등입니다. 유족 등록을 위해서는 참여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또는 문헌, 호적 관련 서류, 신청인 가족관계기록사항 증명서 등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다수 농민이 공식 기록에 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심의위원회는 사료나 문헌이 없으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자세히 서술해 제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진회는 1904년 이용구, 송병준 등 동학의 일부 지도부가 친일로 전환하여 만든 친일단체입니다.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뒤 일진회와 결별하고 친일 인물 62명을 출교 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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