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왜 종교개혁과 이탈리아전쟁을 거치며 쇠퇴하게 됐나요?
이탈리아 전쟁(1494-1559)으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 제국이 전장이 되었습니다. 특히 신성로마 제국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으로 로마의 인구와 경제가 크게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의 예술 후원도 약하되면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재정이 흔들렸으며, 개신교 지역에서는 성상과 종교화가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반면 반동 종교개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종교적 교훈을 분명히 전달하는 예술이 강조되었습니다. 예술은 인간과 고전문화 표현보다는 신앙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더욱 엄격하게 되었고, 이 분위기로 17세기 바로크 미술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르네상스의 쇠퇴는 예술 수준의 하락이라기보다, 전쟁으로 인한 후원 체계의 붕괴와 종교개혁으로 인한 예술 목적의 변화를 뜻합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고전 양식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매너리즘과 바로크 속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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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묘와 도봉구 방학동은 관련이 있는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는 현재 방학동에 있습니다. 본래 폐위된 뒤 교동에 묻혔다가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신씨 집안 선영이 있는 방학동으로 이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안앵담과 정의공주 묘역도 연산군묘에서 120미터 인근에 있습니다. 무 묘역 사이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내 정류장도 '연산군. 정의공주묘'로 함께 운영됩니다. 그리고 방학동 전체는 아니지만 연산군묘 주변은 농촌적인 느낌이 나는 곳으로 주말 농장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즉, 서울속 농촌에 가까운 역사 문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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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나 명절 차례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지냈습니까?
제사와 차례는 한 시기에 한번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입니다. 제사는 고대부터 신령이나 조상에게 음식을 바치는 의식으로 제천행사에 기원합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제사는 고려말 수용된 성리학의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특히 조선시대에 국가적으로 보급되어 사대부 중심에서 일반 백성들에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차례는 명절에 지내는 간소한 제사입니다. 본래는 차를 올리는 의식이라는 뜻이었으며, <주자가례>의 계절 제사 등이 한국의 명절 풍속과 결합해 조선시대에 정착한 것으로 봅니다. 오늘날의 설·추석 차례는 조선 후기의 관행과 근현대의 예절서·언론을 거치며 현재의 형식으로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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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역사는 고조선부터인데 제가 학창시절인가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고조선의 건국 신화와 연결하여 자주 언급되는 것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입니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이고, 재세이화는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다스리고 교화한다는 말입니다.다만 삼국유사 원문에는 홍익인간이 직접 나오나 제세이하가 나란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재세이화는 후대의 해석과 교육 과정에서 홍익인간의 뜻을 보충하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환웅이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해 하늘에서 내려와 다스렸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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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크기나 배치만으로도 당시 사회의 가치관이나 권력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까요?
작품의 크기나 배치만으로도 당시 사회의 가치관이나 권력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서는 인물을 실제 크기가 아니라 중요도에 따라 크기의 차이를 두어 표현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과 신을 크게 신하, 노동자, 포로를 작게 그려 사회적, 종교적 서열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권력과 관심의 중심인 중앙은 배치하고, 신성함과 우월한 지위는 높은 위치, 왕이나 신 옆에는 위치한 인물은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크기와 위치만으로 모든 것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적 규칙, 작품의 목적, 제작자의 의도, 원근법도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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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종교)7대 악마가 누구 누구인가요?
중세 기독교에서 말하는 7대 악마는 7대 죄악을 상징하는 악마들을 말합니다. 널리 알려진 명단은 중세부터 형성되었지만 일곱 악마와 일곱 죄악이 연결됩니다. 루시퍼는 교만을 상징하는 죄악을 의미하며, 마몬은 탐욕, 아스모데스는 색욕, 레비아틴은 질투, 벨제붑은 폭식, 사탄은 분노, 벨페고르는 나태로 분류됩니다. 이 체계는 성경에 그대로 나오는 것은 아니며, 4세기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와 이후 교부들의 죄악 목록에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독일 신학자 페테 빈스펠트가 1589년 죄악과 악마를 연결하여 분류한 것입니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기원은 성경, 유대교, 기독교 전승, 고대 중동 신화 등이 섞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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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마을마다 있던 장승이라는 게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건가요?
장승은 한국에만 있었던 독특한 문화는 아닙니다. 선돌, 신목, 솟대같은 동아시아 북방 지역의 수호 신앙이 한국적 형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중국, 일본에서 그대로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장승의 원형은 선사시대 신성한 기둥이나 나무 신앙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문헌상으로는 신라와 고려 시대에 장승 또는 장생이 사찰과 지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둥으로 등장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입구에 세우거나 경계에 세웠습니다. 따라서 이는 마을의 수호신, 이정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두 쌍으로 만들어 세웠는데,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으로 잡귀와 질병을 막고, 마을을 지키는 역할을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장승은 외래 문화의 수용이 아니라 여러 고대 신앙 요소가 한국의 마을 공동체와 결합해 형성된 고유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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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문화인가요?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특정 인물 한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기원전 1500년 아리아인들이 인더스 강 유역으로 남하하고, 갠즈스 강까지 진출하여 정착하면서 형성한 것입니다. 초기 카스트 제도는 베다 시대의 바르나라는 네계층 구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나뉘었으며, 이후 지역, 직업, 혼인 집단인 자티와 결합하여 세습적인 신분제도로 발전했습니다.인도 헌법은 1950년 카스트 차별과 불가촉성 관행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법이 바뀌어도 결혼, 취업, 교육, 지역 사회 관계에 뿌리내린 차별은 일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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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는 왜 김종직의 조의제문 하나로 그렇게 큰 참극이 됐나요?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글로 초한 전쟁 시기 항우에게 살해된 초나라 희왕(의제)를 조문하는 형식의 입니다. 그런데, 이 글은 세조의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 사사 수장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습니다. 특히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 편찬용 사초에 이글을 수록하고, '충분히 깃들었다'라고 평가한 점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는 왕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역심으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실록 편찬 책임자 이극돈은 사초에 자신의 비리가 적혀 있어 앙심을 품고 유자광 등 훈구파와 결탁해 이를 역공했고, 연산군은 사림파가 장악한 3사의 견제를 없애려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의제문〉은 사림을 ‘임금을 능멸한 역적 무리’로 규정할 명분으로 활용된 것입니다.이는 김종직 문인과 교유한 관료들이 대거 숙청당하는 참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글 하나보다는 사초의 기록 권력, 세조 즉위의 정통성 논란, 이극돈의 개인적 보복, 연산군과 훈구파의 사림 제거 동기가 맞물려 무오사화가 확대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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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왜 간웅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받나요?
조조에 대해서는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의 관점의 차이로 평가가 다릅니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여기기 때문에 조조를 "비범한 인물, 시대를 초월한 영걸"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촉나를 정통으로 하기 때문에 조조를 "난세의 간웅"은 묘사합니다.또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이후 유교적 이념이 강조되면서 조조의 이미지가 악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둔전제를 실시하여 자영농 육성과 군량을 확보하려 하였으며,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또한 엄격하지만 공정한 법치 통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유능한 시인이었습니다.결론적으로 조조는 실제 역사에서는 유능한 정치인, 문학인이었으나 삼국지연의의 촉한정통론에 따라 간웅 이미지가 고착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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