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최초로 황제에 즉위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유럽에서 황제 칭호로 즉위한 인물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비록 황제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진나라의 진시황이지만 유럽에서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개념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즉 2차 삼두정치를 주도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고, 사실상 황제로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그는 카이사르의 죽음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는 프린캡스라고 하였지만 원로원에서는 '존엄한 자'라는 '아우구스투스'리는 칭호로 부른 것입니다. 세계사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재위는 로마가 공화제를 폐지하고 제정의 시작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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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은 왜 프랑스와 독일의 공통 조상으로 여겨지나요?
프랑크 왕국은 5세기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갈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입니다. 하지만 프랑크족이 세운 메로비우스 왕조는 분할 상속으로 왕권이 약하고, 재상 권한이 컸습니다. 특히 카룰루스 마르텔의 아들 피핀이 카룰루스 왕조가 세워졌스비다.그런데, 분할 상속 전통 때문에 칼루루스 대제 사후 9세기 중반 베르됭 조약과 메르센 조약이 체결로 서프랑크, 동프랑크, 중프랑크로 나뉘어졌습니다. 이후 서프랑크는 프랑스, 동프랑크는 독일, 그리고 중프랑크는 이탈리아로 각각 발전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 프랑스와 독일은 과거 카룰루스 프랑크 왕조에서 기원했다는 역사적 기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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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초기 객주, 보부상들이 급성장했는데, 이들이 임오군란 이후 몰락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개항 초기 객주와 보부상은 외국 상인과 조선 상인, 소비자를 이어주는 중개 상인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특히 강화도 조약의 부속조약인 조일수호조규부록에 의해 외국상인들은 개항장에서 10리 이내로 제한하여 국내 소비자들과 거래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객주, 보부상이 중개상인으로 영국산 면직물을 받아 조선의 상인, 소비자들에게 팔아 쌀과 콩들을 수집하여 일본 상인들에게 건네주며 이익을 챙긴것입니다.하지만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청나라 상인의 내지 통상이 허용되고, 일본 상인들도 내지 통상이 가능해지면 중개상인으로서 객주와 보부상들의 역할이 사라지고, 결국 그들의 이익도 감소되어 몰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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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평안도 운산 광산 채굴권을 갖게된 배경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관파천 계기로 열강들은 최혜국 대우 조항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로 부터 이권을 침탈해 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평안도에 소재한 운산 금광을 차지한 것은 조선의 재정난과 일본 청을 견제하려는 외교 전략, 그리고 알렌의 수완에 의한 것입니다.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인 의사이자 외교관인 알렌은 고종과 가까웠습니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민영익을 치료한 알렌은 고종과 민비에게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의 영향력과 청의 내정 간섭으로 벗어나려면 미국 자본과 연결해야 한다고 조언하여 미국에 광산 개발권을 제안하였습니다. 당시 조선도 금광 개발을 통해 재정 수입을 노렸던 것입니다. 결국 알렌의 주선으로 1895년 미국은 조선 왕실이 수익의 일부를 갖는 조건으로 25년간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차지하였습니다. 운산 금광은 1939년 일본에 넘어갈 때까지 40년동안 운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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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에 최혜국 대우가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1876년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1854년 개항을 하면서 미국에 최혜국 대우를 허용했습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일본은 조선에 최혜국 대우 조항을 넣으려 했습니다.아지만 조선은 '앞으로 일본 외에 다른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것'리고 하면서 최혜국 대우 조항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 것입니다.본래 최혜국 대우란 조선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때 더 유리한 조건을 주면, 그 혜택을 일본에도 자동으로 부여하는 조항입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와 조약 체결을 염두해 두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최혜국 조항 포함을 거부하여 강화도 조약에서 빠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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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경운궁에 머문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종은 1896년 2월 일본의 탄압에서 벗어나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1년 후인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가지 않고, 경운궁에 머물었습니다.그가 경복궁으로 가지 않은 것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장소이고, 다시 일본의 위협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경운궁 주변에는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외국 공사관이 모여 있어 일본이 함부로 고종을 협박하거나 개입하기 어려운 지역에 있었습니다. 즉 위급할 때 서양 열강의 외교적 보호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경운궁은 새 왕궁으로 하고, 주변 열강의 공사관이 가까워 근대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유리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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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가도입명’을 내세웠나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정명가도'을 내세웠습니다.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정명향도', 즉, '명나라를 정벌할 테니 조선이 길을 안내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일한 뒤 전쟁을 계속하여 다이묘와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하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권위를 높이며, 조선과 명나라까지 세력을 확대하려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정복 지역을 다이묘들에게 보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침략한 것입니다. 하지만 명나라로 가려는 것이라는 주장은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외교적 구실이며, 조선이 거부하면 전쟁의 책임을 조선에 돌릴 수 있는 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은 구실만이 아니라 조선을 정벌하여 군량과 병력을 제공하는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 침략은 명나라 정복을 위한 중간 단계인 동시에, 조선의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려는 독자적인 침략이기도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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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라는 직위를 최초로 주장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황제'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진 시황제입니다. 그는 기원전 221년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왕보다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황제라는 칭호는 본래 삼황오제의 '황'과 '제'를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진시황은 여러 나라의 왕들을 모두 정복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다른 군주들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진시황은 천하 전체를 다스리는 최고 군주의 공식 칭호로 황제라는 용어를 정착하였으며, 그 뒤 한나라와 여러 왕조들이 이 칭호를 이어받아 사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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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나라 시절 두만강 이북으로 진출한 생각을 왜 안했을까요?
조선의 북방 영토가 두만강 이북을 포함하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닙니다. 세종 때 4군 6진을 개척했는데, 고도가 높고 교통이 불편하고 방어가 여려원 4군 일부를 페지하고 두만강 이남의 방어선에 집중했습니다. 청나라가 세워진 두에는 두만강 이북과 압록강 이북 일대를 자신들의 발원지로 여겨 봉금 지대를 설정하였습니다. 조선 역사 청과 전쟁을 피하려고 공식적으로는 이주와 개척을 추진하기 어려웠습니다.다만 조선인은 두만강을 넘어 약초를 캐거나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였습니다. 1712년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을 규정한 '백두산 정계비'에 토문강을 경계로 하여 간도를 우리 영토로 포함하였습니다. 간도는 두만강 이북 지역입니다. 즉, 두만강 이북 간도 지역에 대해 19세기 영토 분쟁이 일어날 정도로 우리나라는 영토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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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친일재산 환수 추진과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최근 다시 시행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1904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친일 행위 대가로 취드간 토지, 건물 등 재산에 대해 국가 귀속에 대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상에는 주로 토지와 건물을 포함하여 재산을 이미 팔아버린 경우에는 매각대금이나 처분으로 얻은 이익도 환수 대상이 됩니다. 환수된 재산은 국가가 직접 보유하거나 매각해 기금으로 편성합니다. 현재 추진 방향은 순국 선열, 애국 지사 사업 기금에 우선 넣어 독립 유공자와 유족의 생활 지원, 기념 사업, 독립 운동 사료 발굴 등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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